오빠는 잘 있단다
오빠는 잘 있단다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2.08.0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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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산속의 우리 집을 찾아온 그녀가 차를 주차하고 텃밭을 둘러본다. 다시 차 문을 열더니 여러 개의 보따리를 꺼낸다.

마음이 급했던지 안부도 생략한다. 풀어놓는 보따리 속에는 상치와 아욱, 풋고추, 가지, 호박, 수박, 자두가 있고 대파는 비료 포대에 한가득 장들어 있다. 아침에 삶았다는 옥수수가 식으면 맛이 덜하다며 얼른 먹으라고 성화를 대는 그녀는 연신 오빠가 농사지어 준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도 텃밭에서 각종 채소를 심어 수확한다는 걸 알면서도 경기도에서 예까지 가져온 것이다.

그녀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일 년 전쯤 한갓진 곳에 지어진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내려올 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준다. 오빠네 거란다. 오빠라는 단어가 입에 착착 붙는다. 친오빠가 농사를 많이 짓느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위층에 사는 오빠라며 이사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오빠가 아파트 주변에서 농사를 짓는데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란다고 신이 났다. 수박을 썰면서도 오빠가 준 것, 자두를 꺼내면서도 오빠, 그 오빠가 어린 호박을 열 개가 넘게 따 줬다고 또 오빠 한다. 이순 고개에서 저렇게 자랑할 오빠가 생겼다는 게 부러우면서도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오빠란 말이 낯설다. 맏딸이어서 누나, 언니라고만 불렸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살 위인 외사촌 오빠여서 초등학교 시절 외가에 가면 좋아라 따라다녔다. 친구들과 냇가로 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데리고 다니며 다칠까 조심을 시키고 손을 잡아주던 든든한 오빠였다. 결혼 전까지는 서로 왕래도 했으나 지금은 소식을 모른다. 가끔 통화를 시도해보나 연결이 되지 않아 삶이 고단한가 보다 짐작만 한다. 아쉽게도 오빠와의 추억만 동화처럼 남아 있다.

얼마 전, 오 남매의 맏이인 나와 넷째인 여동생이 어릴 적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와 달리 여동생은 예쁘고 공부도 잘했다. 늘 귀여움만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반응이다. 큰오빠가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으로 여겼는지 엄마가 안 계시면 밥상 차려 줘야 하고 담배 심부름을 가지 않으면 난리가 났었다며 고개를 젓는다. 직장생활로 바빴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여동생이 결혼하던 날, 집을 떠나 남의 식구가 된다니까 보호본능이 생겼는지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린 것이 남동생이었다. 오빠란 존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여동생은 껄끄러운 감정이 남아 있고, 아직도 막연한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나는 그녀의 오빠 타령이 부럽기도 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친족 외의 남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가 드물었다. 어른들의 눈총도 따가워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이다. 요즘은 동네 오빠를 넘어 오빠가 지천이다.

남편도 오빠, 애인도 오빠, 나이가 한참 어린 연인이나 남편에게도 오빠란 칭호가 붙는다. 남자가 원하는 경우도 많다.

얼마나 듣고 싶었으면 `오빠가 말이야. 오빠가 해 줄게, 오빠만 믿어, 오빠한테 말만 해, 다 해결해 줄게' 등등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났을 때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어쩌겠는가, 세월이 변했다. 이순의 할머니도 위층의 손위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부르는 데 나는 주위를 둘러봐도 용기 있게 오빠 하며 살갑게 부를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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