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신규식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예관 신규식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2.08.0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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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한쪽 눈으로 평생을 흘려보며 살았던 예관 신규식 선생(申圭植, 1879년 1월 13일~1922년 9월 25일)이 서거하신지 2022년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해다.

신규식 선생은 국권 피탈 이전부터 국력 배양과 민중 계몽 등 민족의 자립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한 애국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 시킨 것이다.

선생의 생명을 건 노력 끝에 중국 땅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지속적이고 다양한 독립운동이 추진될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노력하였고, 결국은 광복을 이룰 수 있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도록 한 숨겨진 주역이다.

선생은 1879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주시 가덕면)에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다. 17세 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하여 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힘을 기르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로서 지방군대와 연계하여 의병 거사를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년 장교 신규식은 서울 시대를 돌아다니며 솟을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이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자 사흘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을 감행하였다.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끊기 위해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약 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고 흘겨보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선생의 자호가 흘겨볼 `예' 자와 볼 `관' 자를 써서 `예관( 觀)'이라 했고 그것 때문에 선생은 당시에 늘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은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마음을 먹고 고향 청주로 돌아와서 교육구국운동을 실시하였다. 고향인 청주 가덕에 문동학원을 설립하고, 이후에 덕남사숙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중동학교장 취임하여 직접 후학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공업을 통한 경제 부흥으로 나라의 힘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 한`공업연구회'를 조직하고, 월간`공업계' 창간하였다. 윤치성, 민대식 등 퇴역 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는가 하면, 분원자기 공장도 세워서 고려청자를 재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노력도 헛되고 결국은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을 위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선생이 서거할 때까지 12년여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선생은 자결 순국을 3번이나 시도하셨다. 목숨을 건 투쟁도 부족하여 스스로 자결 순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1922년 선생은 “정부, 정부”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22년 올해 선생의 고향 후배들이 선생의 얼을 계승하는 뜻깊은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시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 다음번 글에서 선생의 업적을 정리해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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