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위한 제언
선택을 위한 제언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2.07.3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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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난 중도야”

이게 뭔 말인가. 중도라니. 중도(中道)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입장'이다. 이 말은 어느 쪽으로든 때가 되면(자기이익의 때) 선택해서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처럼 비겁한 말이 또 있을까마는 요즘 많은 이가 자신은 중도라며 엷은 미소로 다가온다. 요즘엔 중도가 대세인 듯 관망하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발을 옮긴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엔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한다. 이분법을 조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파괴하는 사람은 계속 파괴만 하고 고치는 사람은 계속 고치는데 일생을 보낸다. 중도와 관계 없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는 변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다. 기성철학으로만 자신을 채워 플라톤화 마르크스화 공자화 노자화 하려고만 하지 누구도 철학사상을 자기화 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한 가지 `주의'가 생기면 맹목적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지구를 위한 세 가지 이야기』를 읽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문득 깨달은 것이다. 지금껏 나는 신념을 지킨다는 이유로 정체되어 있었음을.

어떤 의제(議題) 앞에선 우아한 중도를 자처하며 구경꾼으로만 나이 들었음을.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공부하고 진보해야 했지만 프레임에 갇혀 이십년 전과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는 일찌감치 전쟁과 차별, 환경에 대한 남다른 해석과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 이야기 모두 인간의 약점을 골라 직면하도록 당긴다.

21세기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시대에 `인권의 제국주의'를 방불케 하는 전쟁이 지금 러시아에서 자행되고 있으며 아랑곳하지 않는 독재자는 2036년 84세가 될 때까지 `대통령'이라는 독재자의 다른 이름으로 통치할 예정이다.

차별은 어떠한가, 우리의 언어와 사고, 집단무의식처럼 인에 박힌 차별의 뿌리를 말하자면 입 아프다. 가장 혐오스러운 차별은 직장 내, 혹은 약자에 대한 괴롭힘이다. 존재를 기능과 쓸모에만 맞춘 모드는 환경도 인권도 피폐해 질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이야기 <뉴 행성의 난쟁이들>에서 문명과 개발로 더러워진 지구 환경의 심각성을 말한다. 자연친화적인 사피엔스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푸코는『성의 역사2』에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이라는 호기심의 새로운 정의를 말한바 있다. 우리 문명의 발전이 불편함을 극복해보자는 호기심이었다면 이젠 환경과 다음세대를 위한 불편을 자초하는 호기심의 감수성을 길러야 할 것이다.

탈 취향적인 것과 인사하기, 익숙한 것과 거리두기,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느린 삶을 호기심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세상은 더 없이 편리해져서 살수 없는 게 없다. 그러나 자연과 환경을 파는 상점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고상하고자 하는 독서도 대량소비의 경제법칙이나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문화가 대부분이다. 베스트셀러는 왜 그렇게 주마다 바뀌는지.

선택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하자. 모두의 평화를, 다르지만 존중을, 환경보호를 선택해야한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고고한 중도의 길은 썩어가는 대지와 하늘과 인간성 앞에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야만적인 문명의 삽질을 멈추어야 한다. 자기화 된 새로운 자연 돌봄의 회귀만이 악한 시대를 파도타기 서핑 하듯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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