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둬유, 지들찌리 알아서 하게”
“냅둬유, 지들찌리 알아서 하게”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2.07.2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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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새벽 공기와 잘 버무려진 초록 아침이다. 비둘기 한 마리 뒤뚱뒤뚱 앞서간다. 얼마 만인가? 매일 걷다시피 한 길을 반년 만에 걷는다. 이른 아침 무방비 상태로 걷고 있는데 앞서가던 어르신 한 분이 “냅둬유, 지들찌리 알아서 하겠쥬. 뭐”하며 길에 뿌려놓은 명쾌한 한 마디에 산언저리 배롱나무가 꽃잎을 내려놓는다. 나도 어르신이 뿌려놓은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며 짐짓 그들 앞을 걸었다. 예전과 사뭇 다르게 세상 읽기를 한다. 관심이 없으면 마음도 몸도 멀어진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 풀은 풀이요, 나무는 나무요, 꽃도 그저 꽃으로 다가오는 날이다.

길옆에 풀들이 무성하다. 오늘은 그들과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마을 일에 소임 것 하려고 애썼던 뭇 마음이 무색하다. 열정으로 바라보던 거리가 덤덤하게 지나간다. 사단(四端)의 의미를 새기며 최소한의 양심으로 살고자 했던 세계와의 거리가 선상에 선명하게 놓인다. 인제야 겨우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균형을 잡으며 간격을 좁혀가고 있다. 생각과 실천을 제어하는 마음의 온도가 세상에 맞춰진다. 생각과 마음, 행동이 환경과 융합해나가는 시간이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인간의 욕망은 하늘보다 더 높이 욕망의 탑을 영원히 쌓으려 한다. 길 위에도 타인이 쌓아놓은 욕망의 탑은 수없이 무너지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보면 모두 하나같이 정치 얘기다. 정치가도 아닌데 패가 갈려 언쟁을 한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보자는 소수세력들의 이데올로기가 길위에 너부러져 있다.

정치적으로 내 편을 만들기 위해 우후죽순 늘어난 단체들 어찌하오리까. 순수하게 봉사해야 할 단체마저 자리 다툼하며 꼼수를 쓰고 있는 실태이니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탓하리오. 주위가 온통 이데올로기에 싸여 권력의 끈에 의지해 노력과 무관하게 출세하는 세상이니 3포세대의 심정도 일부 이해가 간다.

산에 오르니 실업을 이야기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뒤뚱거리며 지나가던 동네 비둘기와 달리 쫑쫑거리는 산새를 찍으려고 하니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평탄한 길은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다니고 산중에는 생업과 관련된 실업의 이야기가 길에 놓인다. 산에 오르기 전에 나란히 걷던 할머니 두 분이 “인생 별거여, 누가 쫓는 것도 아닌데, 쉬었다 가자”며 벤치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산에 올랐다.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 삶의 차이는 느림과 빠름인가?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기에 뛰어들었던 지난 봉사의 시간이 준 교훈은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세상 읽기였다. 휘젓고 다닌 똥개가 그 동네 사정을 제일 잘 안다고 해서 그런지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똥개와 여기저기 간을 보는 똥파리를 닮은 사람들이 표심을 사기 위해 분주한 것을 자주 봤다. 권력과 체계로 얼룩진 세상에 그들은 은근슬쩍 정치 세계를 곁눈질하며 흉내를 낸다. 권력가 옆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아부하는 사람이나, 순수하게 움직여야 할 봉사단체에 몇 년간 선심 쓰다가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이나 매양 한가지다. 이런 사회가 만연되고 있으니 차세대가 심히 걱정된다.

세상이 아무리 오염되어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세금을 많이 내 억울하더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땀이 세상의 빛이 되는 날까지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설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능력에 맞지 않은 자리에 있다고 한들 과연 그 자리가 평화로울까? 다소 부족하나마 소신껏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답다. 작은 행복이 가장 위대한 세상을 만든다. 정치가들이 권력 다툼을 하든, 무리가 고함을 지르든 말든 그냥, 냅둬유. 지들찌리 알아서 하게. 우리는 구경만 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니다 싶으면 그때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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