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새는 장님이었다
그 노새는 장님이었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07.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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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나라와 나라를 경계 짓는 공간, 사람들이 서성인다. 어떤 이는 차안에서 또 어떤 이는 길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기다린다. 불가리아 여행 6일 차, 우리는 오늘 루마니아로 넘어간다. 엊저녁은 불가리아의 흑해연안인 바르나에서 묵었다. 멋진 수영장이 딸린 호텔이었음에도 몸 한 번 담그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나마 오늘밤도 나라는 다르지만 루마니아의 콘스탄차라는 지역의 흑해연안의 호텔이라는데 위안을 삼는다.

국경을 향해 달리는 동안 비가 억수같이 퍼 부었다. 세차게 내리치는 빗줄기를 보면서도 불안함보다는 낯선 길에 대한 이상한 감흥에 사로 잡혔다. 어렵지 않게 보이던 길 섶 자귀나무가 정겹게 느껴진다. `자귀나무'는 `야합수(夜合樹)'라고도 부른다. 서로 마주한 잎사귀가 밤에는 닫히는 것을 보고 사이좋은 남녀의 사이를 연상시켜서라니 참으로 요염한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국경을 향해 가는 버스가 한적한 길을 달려가는 동안 잠에 취한 회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은커녕 정신이 더 또렷해져 갔다. 시간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비가 오는 탓인지 사위가 어둡다.

그렇게 내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이국의 풍경에 넋을 잃고 있을 때였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 앉아 계시던 노교수님이 내 앞으로 책 한권을 불쑥 내미셨다. 큰 소리로 읽어보라며 펼쳐 준 곳에는 `노새 이야기'라는 글이 보였다.

“태양 아래 그 노새는 서 있었다. 우리가 발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은 대개 정오 무렵. 노천의 해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목화밭 가장자리에 끝도 없이 열을 지어 서 있던 해바라기도 축축 처지는데,( )그 녀석은 마침내 우리를 태우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달려오다가 치이고 말았다. 다리를 다치고 태양 아래 널브러져 피를 흘렸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서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 녀석이 장님이라는 것을.”

허수경 작가의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라는 책에 나와 있던 작품이었다. 글을 다 읽은 나는 잠시 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이상했다. 이국땅을 달리는 차 안에서 오롯이 내 목소리만이, 모든 소리를 잠재우고 울려 퍼졌다는 생각에서 일까. 아니면 그 노새가 차에 치인 이유가 너무도 황당해서, 그도 아니면 노새의 사연이 가슴이 아파서 일까. 더 이상했던 것은 가슴에서 무언가 뭉클 올라오더니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때 차창 밖은 비가 멈추고 태양이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 너머로 붉게 물을 들이고 있었다. 묘하게도 책속의 문장들과 차창 밖의 풍경들, 침묵이 흐르던 버스안의 분위기, 그 모두가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생경함이었다. 아마도 그건 이국땅이었기에 가능한 그 무엇이었지 않았을까.

세 시간여를 국경에서 머무르던 차가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야 현상의 영향인지 이곳은 밤 9시가 되어도 환하다. 9시를 훌쩍 넘겨서 일까.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이 시간을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했던가. 빛과 어둠의 경계가 되는 모호한 시간이다. 지금부터는 루마니아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이 어둠속에서 손짓을 한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이제는 밖의 모습이 흐릿할 뿐이다. 간간이 나오는 작은 마을을 지나면 빛이 보였다 다시 사라진다. 지난밤에 보았던 흑해와 오늘밤에 머물 흑해는 다를까. 이런 저런 생각에 밖의 풍경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흑해 연안에 자리 잡았다는 우리가 머물 호텔은 세찬 바람이 먼저 맞아 주었다. 그 밤, 우리 숙소와 잇대어진 난간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밤새 고성을 지르며 서성였다. 할 수 없이 나도 갈매기의 하소연을 듣느라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혹시 그 갈매기도 차를 향해 달려오다 치이고 만 노새처럼 장님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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