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박(淡泊)한 여름의 꿈
담박(淡泊)한 여름의 꿈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7.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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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淡泊爲歡一事無(담박위환일사무) 異鄕生理未全孤(이향생리미전고) / 客來花下詩卷(객래화하휴시권) / 僧去牀間落念珠(승거상간낙염주) / 菜莢日高蜂正沸(채협일고봉정비) / 麥芒風煖雉相呼(맥망풍남치상호) / 偶然橋上逢隣(우연교상봉린수) / 約共扁舟倒百壺(약홍편주도백호)

담박함을 즐길 뿐 아무 일도 없지만/ 타향에서 산다 해도 외로운 것만은 아니네./손님 오면 꽃그늘에서 시집을 함께 읽고/스님 떠난 침상 가에서 염주를 발견하네./장다리 밭에 해 높이 뜨면 벌들이 잉잉거리고/보리 까끄라기에 미풍 불면 꿩들이 꺼겅대지./우연히 다리 위에서 이웃 사는 영감 만나/일엽편주 띄워 놓고 취하도록 마시자 약속했네.

<정약용. 담박(淡泊)>

얼마나 오래 끓였는지 진득한 삼계탕을 중북날 복달임으로 먹은 뒤끝이 영 개운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욕심이 없고 순박'하거나 `깔끔하고 느끼하지 않으며', `연하고 산뜻한' 담박(淡泊)의 의미와 느낌을 영영 잊고 마는 것은 아닌가.

밥상 위에서도 펄펄 끓는 닭고기가 한때는 생명체였다는 사실은 `복날'이라는 습관적인 통과의례를 지나는 식탐의 순간에 기억하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절대로 부족할 리 없는 현대인의 영양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뜨겁고 걸쭉한 국물과 살코기를 섭취하는 일은 그저 버릇 같은 위안을 삼고 있을 것일 뿐이다.

`지금/여기'의 모든 먹는 행위는 생명의 유지라는 본질을 이미 한참 벗어나 있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보다 잘 먹을 것인가에 대한 탐닉과 어제보다는 오늘 더 자극적이고 기억에 남는 쾌락의 수단으로 세상의 모든 `먹는 일'은 치닫고 있다.

`담박'(淡泊)하게 사는 일이 쉽지 않으니, 담백(淡白)한 맛을 그리워하는 일은 사라지고 `단짠' 또는 `겉바속촉'의 극단적인 미각과 식감에 지배를 받으며 본래의 입맛을 잃어가고 있다.

`먹는 일'은 `사는 일'이다. 먹기 위해 사는 것과 살기 위해 먹는 것의 차이가 부익부 빈익빈의 극명한 갈림처럼 좁힐 수 없는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맛의 순수한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다만 정성 가득한 손맛은 사라지고, 대기업의 맛으로 획일· 표준화되면서 재료 본연의 맛보다는 갖가지 첨가물이 켜켜이 조미되는 포장된 맛에 길드는 자극이 인간의 심성에는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채식주의자가 아닐지라도 건강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관념으로 습관처럼 섭취한 닭 한 마리가 불과 몇 날을 살았으며, 사는 동안이라도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공장식 생산물에 불과했다는 불편함은 `치느님'을 `추앙'하는 인간에게 가능한 감정이겠는가.

`담백한 맛'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만큼, 자주 쓰이지 않는 `담박하다'는 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지도 모른다.

오로지 빠른 성장만을 추구하는 급변하는 세상과 현대인은 담박함이 은은한 삶의 향기가 되어 세상을 맑고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용납하지 못하며 무더운 여름만 탓하고 있다.

영양이 남아도는 식생활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자극적인 입맛의 극단적 취향은 적대시로 치달으며 남의 탓에 일관하는 대결과 대립, 갈등의 사회적 병리 현상과 전혀 무관한 것인가.

`욕심이 없고 순박'한 담박(淡泊)의 삶은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마저 숨죽이고 있는 여름 한복판의 땡볕과도 같은 것. 어쩌면 다산이 <담박(淡泊>에서 풀어 쓴 그 치열한 외로움은 더위를 식혀 줄 산들바람이거나, 소나기와 무지개를 준비하는 고요의 여름이 아닐까. 염주를 두고 갈 수 있을 만큼 몰입한 스님처럼 `지금/여기' 우리들의 여름은 얼마나 담박할 수 있겠는가.

거의 모든 것을 억압과 굴종의 과거로 되돌려 놓고 말겠다는 기득권자들의 모진 발톱이 날카로운데 담박한 삶, `욕심 없이 깔끔하고 산뜻한' 삶은 정녕 `한여름 밤의 꿈'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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