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숲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2.07.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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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 나는 내내 불안에 휩싸여 지냈다. 직장에서도, 퇴근 후 집에서도 완전히 일에 몰두했다. 그래도 불안감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주말을 맞아 산을 올라본다. 흠뻑 땀을 흘린 후 여름 자작나무 숲에 들면 불안감을 좀 쫓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산을 오른 지 한 시간도 넘었지만, 자작나무는 좀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안내도에 따르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걷다 힘들면 바위에 걸터앉아 잠깐씩 쉬어간다. 소나무 숲 사이로 간간이 부는 바람과 계곡의 물소리가 땀을 식혀 준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하얀 둥치에 파란 잎을 단 자작나무 숲이 홀연히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자작나무 숲의 분위기는 몽환적이다. 그리고 신비롭다.

자작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들어서자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맞아주는 것 같다. 표지판의 안내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풍광에 매로 되어 바라볼 때는 매끈하고 건강한 나무만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나무들도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서 있다. 검은 혹이 보기 흉하게 솟아오른 나무, 깊은 상처가 옹이로 남은 나무, 오랜 시간 칡넝쿨이 감아 조인 듯 검은 자국이 선명한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볕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는 먼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떨구고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삶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안쓰러웠다. 아픔을 감내한 흔적을 검은 무늬에 새기고 있는 나무는 움켜쥐기보다 스스로 떨쳐내야 단단해지는 삶이 될 것이라 일러주고 있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묵묵히 인내한 나무를 보며, 남편도 지금은 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나무처럼 꿋꿋하게 바로 설 것이라 믿는다.

아홉 겹의 껍질을 가진 자작나무는 아름다움만큼이나 다양하고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방부제 성분이 들어있어 팔만대장경 목판 일부가 되었고, 천마총의 천마도 그림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다. 어디 그뿐인가. 옛사람의 백년가약을 맺는 첫날밤을 밝힌 화촉(樺燭)도 유분이 많은 자작나무 껍질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나무는 신선한 공기로 수액으로 아낌없이 주고도 모자라, 생을 다한 뒤에도 팔만대장경으로 천마도로 시공을 넘어 우리 곁에 와 있다.

숲속 인디언 움막 옆에 돗자리를 깔았다. 누워서 하늘을 본다. 곧게 뻗은 나무 끝에 미세한 바람이 인다. 파란 잎사귀가 흔들리나 싶더니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나무 기둥 전체가 일렁인다. 나무는 바람에 온몸 맡기고 있다. 백색의 신사의 모습이 되기까지 많은 아픔을 겪었을 나무, 나무와 나무가 서로 어깨를 견주며 함께 바람을 맞아들이고 있다.

한참 몰아치던 바람이 멈추자 서걱거리던 소리도 멈췄다. 잎 사이로 쏟아지는 볕을 안은 채 나무는 당당히 서 있다. 그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고마워 바라보고, 안아보고, 만져보면서 나는 또 남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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