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가에서
연못가에서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07.1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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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여름이면 사람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요즘은 냉방 시설이 잘 갖추어진 실내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여름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열치열 식으로 활동에 나서기도 해서, 전기가 없던 과거 시절에 비해 사람들의 여름 활동이 늘어나긴 했어도 여전히 봄 가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서 여름 풍광은 장마나 태풍 같은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정적(靜的)이다. 물가나 숲 그늘을 찾아 움직임을 자제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여름나기의 모습들이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여름나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못가에서(池上二絶)

山僧對棋坐(산승대기좌) 스님은 바둑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데
局上竹陰淸(국상죽음청) 바둑판 위에는 대나무 그늘이 맑게 드리웠네
映竹無人見(영죽무인견) 대나무에 해가 비추어 사람은 뵈지 않는데
時聞下子聲(시문하자성) 때때로 바둑알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네

시인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어느 날, 더위를 피해 연못가를 찾았다. 여기서 모든 움직임이 멈춘 듯한 여름 풍광이 시인의 예리한 눈에 포착되었다. 결가부좌 수행이 일상인 산승(山僧)이 신선놀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산승과 바둑 둘 다 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이들을 여름 풍광을 그려 내는 데 동원한 것은 시인의 탁월한 안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속세를 떠난 산승이 마주한 것은 번다함을 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속의 일과는 무관한 바둑판이다. 바둑 자체도 인간을 벗어난 선계(仙界)에서 행해지는 신선들의 유희 아니던가? 정적인 모습에 탈속의 의미가 결합된 이미지가 여기서 창출된다. 바둑판 위로 어른거리는 것은 연못가에 서 있는 대나무의 맑은 그림자이다. 사람들의 진부한 욕망은 얼씬도 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대나무 숲 사이로 기운 해가 들어와 비추니 눈이 부시어 바둑 두는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대신 바둑 돌을 내려놓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 바둑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릴 뿐이다. 바둑판이라는 작은 공간에 자리한 여름의 모습, 부동(不動)과 탈속(脫俗)의 자세로 여름을 지나가는 지혜를 절묘한 감각으로 그려 낸 시인의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무더위로 지내기 힘든 게 여름이지만, 슬기롭게 지내는 방법이 다 있게 마련이다. 물과 그늘을 찾아 몸을 쉬는 것, 더불어 욕망과 근심도 쉬는 것이야말로 슬기로운 여름 생활의 요체일 것이다.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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