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어야 할 때
문을 열어야 할 때
  •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수필가)
  • 승인 2022.07.10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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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수필가)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수필가)

 

첫째 아이를 낳고 한동안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친정엄마 연세 정도의 산후도우미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요즘 엄마들은 참 힘들겠어. 집 문 꼭 닫고서 애랑 둘이 있으니 당연히 우울하지. 말할 사람이 있길 하나, 할 게 있기를 하나, 애 수발만 들고 있으니 사람이 멀쩡할 수가 있겠어? 나 애 키울 때만 해도 옆집 윗집 아랫집이랑 다 같이 애를 키웠는데 말이야. 우리는 급한 일 생기면 냅다 전화해서 애 봐 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된다 하면 얼른 애 맡기고 일 처리하고 그랬어.”

자신의 자녀 나이 정도 되는 내가 넋을 놓고 있는 모습에 안타깝기도 하고, 날이 갈수록 흉흉해지는 현실이 한탄스럽기도 한마음에 건넸던 말씀이겠지만 그 당시 내 마음에는 하나도 와닿지 않았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가는 세상에 옆집에 아이를 맡긴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마음이 지옥 같았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기억으로 소환해야 할 만큼 시간이 흘러 아이는 유치원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다. 어느 날부터 아이는 단짝 친구가 생겼다며 그 친구에 대해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고 하루는 우연히 하원길에 있는 놀이터에서 딸이 늘 이야기했던 단짝친구와 그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의 낯섦도 잠시 아줌마들 특유의 사교성으로 어느새 동네 언니 동생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노는 사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언니는 직장 때문에 이 지역으로 왔고, 그래서 이렇다 할 연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움받을 사람이 있어도 벅찬 것이 육아인데 부부가 오롯이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말에 과거의 나를 마주한 듯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고충과 감정을 활발히 교류하며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퇴근 후 아이를 하원하러 가는 길에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퇴근이 늦어져 제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없게 되었는데 자신의 아이들도 같이 하원 시켜서 도착할 때까지만 데리고 있어 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해왔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언니가 도착했다. 너무 고마워하는 언니에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거리끼지 말고 전화하라고 말하자 얼굴에 감동의 빛이 스쳤다. 그 빛을 보고 있으니 6년 전 산후도우미님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마 투박했던 말이 다 끝난 후에도 내 눈에 머물던 눈동자가 서로가 조금만 경계를 허물고 상대 아이를 포용해 줄 수 있다면 육아의 늪에 빠져 정체성까지 잃어가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고,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부모가 불가피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떤 급박한 상황을 조금 더 수월하게 넘길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이 넘치던 그때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 알고 지낸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사례가 셀 수 없이 많기에 누군가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내민 손도 의심부터 드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불신을 쌓아가는 동안 누군가는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고립된 채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져가고 있다. 비단 육아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청년 고독사, 노인 고독사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 시간이 오래인 만큼 답답할 정도로 더디게 가더라도, 이제는 하나하나 문을 열어야 한다. 매일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보면서도 모른 척하고, 어린아이가 인사를 해도 그 아이를 모른다는 이유로 못 들은 척하는 모습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모습일까. 하다못해 내가 예의상, 습관적으로 건넨 인사가 어떤 인연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삶의 희망을 찾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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