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로 남는 인연
무늬로 남는 인연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2.07.0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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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21세기, 글로벌 시대라 일컫는다. 저편에서 일어난 일로 이편의 경제가 휘청이고, 이 끝의 문화 예술로 저 끝 나라들이 들썩이는 시대이기에 그렇다. 경제와 문화 등의 톱니들이 뭉쳐 하나 되어 움직이는 세계화는 서로에게 빠르게 영향을 끼친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매한가지로 일어난다. 인터넷망을 타고 흘러 다니는 SNS 글과 영상들은 `그대가 지내 온 삶의 발자국들을 우리가 다 알게' 하는 장치이며 새로운 `관계 맺음'의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지속시키길 권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유효한 때가 있기도 하다.) 이 말에는 좋은 인연이어도, 그렇지 못한 인연이어도 소중히 여기란 조언이 들어있다. 한정적인 생활반경으로 늘 부딪는 한정된 관계 속에서 지내야 하는 삶에서는 중요한 덕목이었을 것이다. 얽히고설켜 있는 연줄,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으니 말이다.

세계화 시대와 SNS의 발달은, 관계 맺어지며 생기는 연줄인 인연에 대한 인식도 바꿔놓았다. 글을 주고받으며 스치고 지나치는 인연도 많아지고, 손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연은 허다해졌다. 좋은 인연보다 그렇지 못한 인연의 줄을 쥐고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인연 끊는 것을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어, 힘들어진 관계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할 즈음 `괜찮아! 끊어도 돼!'라고 말해 주는 작가들의 글은 나를 위로했다. 법정 스님의 `모든 사람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글 또한 서너 달을 앓고 고뇌하며 내린 `자발적 인연 끊음'에 용기를 줬다. 모든 인연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때로는 그래도 되는 거였다. 인연이라는 것이.

작가 안효림은 인연을 주제로 그림책 <인연/길벗어린이>을 냈다. 하늘을 나는 연(鳶) 이야기로 사람 사이의 인연(因緣)을 묘하게 얼버무려 놨다. `바람이 불면, 손을 놓아! … 연이 간다.'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싯적에 연 좀 날려 봤다면 알 것이다. 바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연은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며 바람에 안기기도 하고 다정하게 서로 감싸기도 하며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을 마음에 새긴다.

순풍만 있으면 좋으련만, 세찬 바람에 휘둘린 연은 연줄을 팽팽하게 한다. 곧이어 `연이 끊·어·진·다.' 이 극적인 순간을 작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바람 타고 날며 서로 엉키고 부딪히며 보낸 시간이 새겨졌을 연줄이 폭죽 터지듯 역동적이며 아름답게 끊어지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단절을 뜻하지만 긴장감과 날카로움이 있는 인연이었다면 해방을 가져다주는 결단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인연을 지키려 애면글면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다.

“일부러 끊어 낸 것인지, 어쩌다 끊어진 것인지, 개운하게 풀어진 것인지, 저절로 돌아올지, 찾으러 가야 할지 아무도 모를 연이 점점 멀어진다.” 그림책 <인연/안효림/길벗어린이> 얼레에서 연이 훨훨 날아가며 점점 멀어지는 모습은 마음 정리하게 한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난 느리지만 오래 이어지는 인연, 굴곡을 겪어 튼실해진 인연, 강렬하게 시작했으나 흐지부지 넘어간 인연, 화살처럼 빠른 인연, 칼로 무 자르듯 끊어 낸 인연! 이 모든 인연은 연줄로 남아 삶의 시간에 무늬를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인연은 없다는 말이다. 시절에 따라 양태는 다르지만 얽히고설켜 있는 인연! 끊기도 다시, 다른 연을 맺기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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