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미학
공간의 미학
  • 한기연 시인
  • 승인 2022.07.0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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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시인
한기연 시인

 

말로만 듣던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를 제대로 실현중이다. 불필요한 물건과 일을 줄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해하며,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실현으로 오히려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는 단순한 생활방식이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성향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다.

열흘 전부터 냉장고가 기능을 멈췄다. 서비스센터에 의뢰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가까운 수리점에 의뢰하니 부품이 없어서 불가능하단다. 가전제품에는 관심도 없는 문외한이라 주변에 물어보니 연식이 오래돼 새로 구입하길 추천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종류도 많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된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새로 구입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꺼내면 꺼낼수록 신기했다. 작은 공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음식과 저장 식품 중에는 기억에도 없는 물건이 더러 있다. 있는 걸 잊어버리고 두 번 사서 쟁여 둔 것도 보인다. 우선 냉장이 급한 식품은 조리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꼭 냉장해야 하는 것은 김치 냉장고에 넣었다. 건조식품은 주방 한쪽에 두었다.

토요일마다 청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는 마트가 있다. 그곳에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식품을 싸게 파는 코너가 있어서 반조리식품을 사서 자주 먹는다. 지난주에도 습관처럼 마트로 향하다가 돌아섰다. 냉장고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냉장고 없이 신선도가 떨어지고 있는 음식을 먼저 사용해야 한다. 처음의 불편함은 조금씩 익숙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단 냉장고뿐만이 아니다. 컴퓨터 저장공간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자료에 대한 욕심이 과하다 보니 쓰지도 않고 무조건 저장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몇 개월 전에 예기치 못한 일로 이 또한 의지와 상관없이 비우게 됐다. 랜섬바이러스가 침투해 파일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추억으로 저장해 온 사진이었다. 전문가에게 의뢰하니 랜섬이 걸리면 다른 것도 감염될 수 있어서 무조건 없애야 한단다. 어떤 자료가 얼마만큼 있었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로 많았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사진 파일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만든 PPT자료가 가장 아쉬웠지만 미련 없이 털어 버렸다.

소크라테스는 `행복의 비결은 더 많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것으로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 있다.'라고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을수록 진리다. 얼마 전에는 문득 내가 갑자기 없어진다면 내게는 소중하고 쓸모 있다고 생각했던 물건들도 타인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을 살핀다. 버릴 것이 없어 보인다. 가짓수는 많고 막연하여 어떤 것부터 정리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리컨설턴트의 조언을 떠올려 보면, 상자를 준비해서 현재 사용하는 것, 오래 사용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그리고 오래 사용하지 않고 필요 없는 것으로 분류해서 담는 것이 첫 번째 시작이다. 진짜 버려도 되거나 기부해도 되는 물건을 나누는 것이다. 재검토 해봐도 필요 없는 물건, 보관할 공간이 없는 물건,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물건, 쳐다보면 기분 나쁜 물건 등은 무조건 버린다.

비우고 사는 일이 쉽지 않다. 비단 물건뿐이 아니라 삶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관계, 고민, 생활 습관 등 점점 더 여유가 없다. 이번 기회에 공간을 비워야겠다. 우선 계단을 오르 듯 천천히 부분적인 정리부터 시작하자. 아름다운 공간에서 삶의 질도 높이고 현명한 소비로 제대로 된 미니멀 라이프를 즐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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