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자식과 환향녀의 슬픈 이야기
호로자식과 환향녀의 슬픈 이야기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2.07.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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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국어시간에 배운 이 시조를 못 외우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몇 해 전 소설 `남한산성'이 영화로 만들어져 온 국민을 울린 사건이 이 시조의 시작이다. 이 시조는 김상헌 선생이 피눈물을 흘리며 남긴 시조다. 이 글에 나타난 `삼각산'은 북한산을 말한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뿔처럼 서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나이 70세에 청나라에 포로로 붙들려 고국을 떠나면서 북한산과 한강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세력과 인조는 병자호란을 당해 힘 한번 제대로 못써보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피난처 남한산성에서 한강 나루터 삼전도로 나와 침략자를 향해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언 땅에 아홉 번 머리를 박는)를 행한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땅에 인조임금의 이마가 짓이겨져 피가 흘렀다. 침략자들은 물론 조선의 신하들과 백성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1637년 1월 30일, 치욕적인 이날을 삼전도의 치욕이라 한다.

김상헌은 이때 `항복하자'며 주화파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었던 사람이다. 국서를 찢은 죄를 청하며 죽여줄 것을 왕에게 요청했던 강직한 분이 바로 김상헌이다. 결국 그는 수십만 명의 조선 여자들과 함께 포로로 청에 끌려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포로만 60만명인데, 그중 여성이 5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환향녀들은 절통함과 비통함이 설움의 무게에 짓이겨지고, 뭇 사람들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행실이 나쁜 여자인 화냥년의 어원이 바로 환향녀다.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은 오히려 큰 사회문제가 됐다. 정조와 절개를 잃고 돌아온 여자들에게 한양 도성 북쪽 홍제천에 몸을 씻고 들어오면 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는 기발한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역사인가?

`호로자식' 또는 `후레자식'이라는 욕설이 있다. 사전에 찾아보니, `배운 데 없이 막되게 자라서 몹시 버릇없는 자를 욕하여 이르는 말'이다. 원래 이 말은 청의 포로 또는 노비, 즉 `호로'나 `호노'에서 온 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환향녀'라는 한자어의 발음이 `화냥년'으로 변한 것이라면, 그 `환향녀'가 낳은 아이가 `호로자식'이 되는 것이다. 힘없는 민족의 백성에게 주홍글씨의 원죄처럼 남겨진 것이다. 서울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 길가에 서 있는 `삼전도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의 여인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환향녀'로 만든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칭송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치욕의 기록이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말 속에도 민족의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아무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말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자랑스런 역사는 긍지로 삼고, 수치스런 역사는 가슴에 새기자. 잘못된 역사는 지금부터 바로잡자.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호로자식'이나 `화냥년' 같은 욕설은 입에 담지도 듣지도 말자. 말에 힘이 있다. 긍정의 말, 희망의 말, 사랑의 말들만 가득한 세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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