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엘리노어를 기대하며
한국의 엘리노어를 기대하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2.06.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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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1933~ 1945년 재임)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는 권총을 가지고 다녔다. 그녀가 경호원 대동을 한사코 거부하자 백악관 경호팀이 호신용 권총을 소지하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경호원 없이 오픈카를 타고 외출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감시나 관찰 받는 것을 극도로 꺼렸지만 대외활동은 왕성했고 때로 파격적이었다. 해서 남편보다 더 언론의 이목을 끌기 일쑤였다.

앨라배마의 한 극장에서는 흑인 전용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며 인종차별에 항의했다. 경찰이 주법을 들어 백인은 유색인종 좌석에 앉을 수 없다고 하자 간이의자를 가져와 복도에 앉았다. 백악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흑인 인권단체 회원들을 초청해 남편을 만나도록 했다.

대공황으로 양산된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정착 프로젝트에도 적극 참여했다. 칼럼을 언론에 기고해 부자들의 동참을 촉구했고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기도 했다. 청년들의 사회참여운동에서는 개척자 역할을 자임했다. 청년단체를 망라한 전미청년기구(NYA) 창설을 주도하고 백악관에 수시로 회원들을 초청해 남편이 미래 세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도록 했다. 좌파 단체 청년들에게까지 초청장을 돌렸다.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FBI(연방수사국)에선 “영부인이 빨갱이가 된 것 같다”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굽히지 않았다.

엘리노어는 미국에서 역대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 레이디로 꼽힌다. 그의 튀는 행보는 보수단체의 비판을 샀지만 대중으로부터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모든 활동이 빈민·유색인종·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무한 애정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 유일의 4선 대통령이다. 이 전무후무한 기록의 배경에 부인 엘리노어가 있었다. 1945년 남편이 죽고나서는 UN 대사로 임명돼 UN의 세계인권선언 채택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48년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현직 대통령 트루먼을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에 올랐다.

좁은 지면에 엘리노어 스토리를 장황하게 소개한 것은 한국에도 엘리노어가 탄생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가 이런 기대감을 높인다. 우선 김 여사에게서는 엘리노어 못지않은 에너지와 열정이 느껴진다. 그는 지난해 12월 학력위조 논란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며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 집무실 사진 유출과 봉하마을 지인 수행이 논란이 되며 그가 약속한 조용한 내조의 기준이 드러났다. 나름 자제한 내조가 이럴진데 대국민 약속을 보류하고 외부활동을 본격화 할 경우 불꽃같은 역동성과 진취성을 기대할만 하지 않은가?

김 여사에게는 대통령과 여당 말고도 자신의 활동을 열성적으로 뒷받침할 든든한 우군이 있다. 대통령 부인으로서 그는 전대미문의 강력한 팬클럽을 거느리고 있다. 팬클럽이 외부 비판에 날을 세워 대응하는 모습에서는 일편단심의 충성심이 감지된다. 김 여사가 무슨 일을 하든 고락을 함께하며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먼저 김 여사가 할 일은 관심과 배려의 대상을 학대받는 동물에서 낮고 후미진 곳에서 고단한 일상과 분투하는 사람들까지로, 지인에서 `미지인'까지로 확장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과 호흡하며 그들이 처한 실상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실효적인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을 지상과제로 삼는 것이다.

김 여사가 불안한 보수 인사들은 팬클럽 해체와 자제를 주문하고 있지만, 그가 내재된 열정과 창의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긍정적 역할을 할 수있도록 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 김 여사가 한국의 엘리노어로 칭송받는 대반전이 상상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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