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Well dying) 그 이후
웰다잉(Well dying) 그 이후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2.06.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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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사후 세계를 본다. 인간의 삶은 가혹하리만큼 치열하지만, 개인의 삶은 위대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다고는 하나, 진정한 가치는 그 존재가 사라진 다음에 평가된다. 가치의 평가는 역사나 과학이나 문학이나 인간이나 종족, 환경, 시기에 지배받는 것은 매양 한가지다. 쌩뜨 뵈브가 문학 연구를 정신의 박물관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송해 선생님을 한국 근현대사의 박물관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며칠 전 송해(송복희) 선생이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이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마무리는 도대체 뭘까? 웰다잉(Well dying)이 웰리빙(Well living)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가치나 평가는 종족, 환경, 시기가 필수불가결의 원칙이라면 그의 삶은 이 시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국 근현대사를 읽을 수 있는 박물관이다.

“전국 노래자랑” 진행자로 알려진 그는 1927년 황해도 출신으로 1·4 후퇴 때 가족과 이별하고 실향민으로 살았다. 삶의 곡조야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소탈한 성격과 능수능란한 진행으로 시청자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의 당당함은 고령이란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전국을 누비며 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시간은 우리의 비타민이었다. 한국에서 최장수,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인물보다도 나는 그의 주검 앞에 애도하는 문객을 보고 `어쩌면 저렇게 잘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잘 죽었다는 말은 웰다잉(Well Dying), 인간으로서 존경할 만큼 인간애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가 병원에 있을 때 동료나 주위 사람들이 애석해하는 모습과 공중파 방송에서 연일 내보는 그의 발자취에서 한 인간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가 자주 다니던 국밥집, 사우나, 이발소가 있는 송해길을 지나 부인이 잠들어 있는 송해 공원에 영면하신 마지막 길을 나는 기억한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가 무엇인가를 남기며 잠들었다. 하지만 꿈에 그리워하던 고향은 아직도 미완의 거리에서 멈춰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마무리,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읽는다. 미래 세대는 현재 우리가 말하는 근현대 세대의 뼈아픈 과거를 기억이나 할까?

우리는 초복, 중복, 말복 하며 운(運)을 운운한다. 특히 말복 운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복과 운은 본인의 노력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 기준을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풍요에 집착하거나 요행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환경적 지배를 피해갈 수 없는 테드의 환경적 3요소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 흙 수저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에게는 상전벽해란 말이 있듯이 세상은 변화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변화 속에 우리는 성장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 고 묻는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 개인의 사리사욕 없이 공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아닐까? 설마 하늘나라에서는 오판은 하지 않겠지. 공적으로 진실하게 산 사람을 오판한다면 신이든 인간이든 심판자로서는 이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지나가는 말에 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혹시 방대한 오점은 없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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