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0점 조정
마음의 0점 조정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2.06.0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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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저울이 자신의 본분 즉, 온갖 물건들의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선, 반드시 0점 조정이 선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무게를 재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허사가 되고 만다. 사람의 경우도 저울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선 마음의 0점 조정을 통해 지공무사한 순수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마음을 0점 조정하는 일을 불교에서는 모든 업식(業識)을 녹이고 나 `없음의 무아'를 깨닫는다고 표현한다. 기독교에서는 제 안의 모든 주견을 텅 비워내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는 것으로 표현한다. 유교에서는 마음의 0점 조정을 우리 내면의 본 성품인 밝은 덕 즉,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와 관련 중용은 “희로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 위지중(謂之中)” 즉 희로애락이 일어나기 전의 텅 빈 마음을 중(中)이라고 정의 내린 뒤 “중야자(中也者) 천하지대본야(天下之大本也) 즉, `중(中)'이 바로 천하의 근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기도, 수행 등을 통해 오랜 세월 쌓여 온 업식을 녹여냄으로써 마음을 0점 조정해야만 `나 없음'의 갓난아기 같은 순식 의식을 회복하게 되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정견에 따른 정사 정언 정행의 올곧은 삶이 가능해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마음이 0점 조정돼 있지 않다면 각자 각자의 오랜 업식의 우물 속에 갇힌 채 자신에게 익숙한 편협된 생각의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나 없음의 지공무사한 순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됨으로써 지혜롭고 올곧은 멋진 인생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마치 개가 습관적으로 쉰내 나는 뼈다귀에 눈길을 빼앗기면서도 신선한 살코기와 뼈다귀를 살 수 있는 수표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이 0점 조정되면 분별없는 0의 자리만을 고집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편안함만 추구하거나 아무 쓸모가 없는 잉여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일도 없게 된다. 마음을 0점 조정해 마쳤다면 목전의 현실 세계를 떠나 일 없는 산속으로 도피하는 일 없이 열정적인 현실 참여를 통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며 파사현정(破邪顯正)할 뿐이다. 이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지공무사한 군자의 대로행(大路行)이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사(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 사상(四相)을 여읨 없이 여의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며 물처럼 흘러가는 보살의 무아행(無我行)이며,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피며 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기적인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간 군자(君子), 반야 지혜를 깨달은 `보살', 제 안의 온갖 주견 비워낸 `심령이 가난한 자', 흐르는 물처럼 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도인(道人)을 21세기에 걸맞게 표현한다면 마음을 0점 조정한 지혜롭고 올곧은 `리더'에 다름 아닐 것이다. 끝으로 21세기를 이끌어갈 진정한 `리더'의 중요 덕목을 꼽는다면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라도 그른 것은 그르다고 비판하고 상대 정당의 정책도 옳은 것은 흔쾌히 인정하는 것, 어느 한순간도 자신의 필요와 이득에 따른 `내로남불'의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일 없이 탁하고 어두운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데 앞장서는 것 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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