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면?
다 버리면?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6.0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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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지금 당장은 그게 아니면 절대 안 될 거 같지만 지나고 나면 그게 다 쓰잘 데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저 인간 아니면 죽을 거 같아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저 인간 때문에 못살 거 같다고들 한다. 내 이야기는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것들이 많아진다. 자연스럽게‘그럼 꼭 매달려야 하는 건 뭐지?’라는 의문이 든다.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한 번 찾아보자.
다른 사람과의 얽힘, 인간관계? 부부유별(夫婦有別)을 가장 앞에 놓는 건 그게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부부가 서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아직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면 그건 좀 이상한 거라고 보면 된다. 있기는 하지만 서로의 존재감에 대한 느낌이 없어야 오래간다. 그리고 헤어질 때도 따라 죽지 않게 된다. 무슨 이야기냐구?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인 부부관계도 결국은 있는 듯 마는 듯하게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이런데 다른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 다른 사람과의 얽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타자에 얽히면 의존하게 되고 중독된다. 한두 번 만나 서로를 탐색하다 보면 어느새 좋아지고 좋아지면 중독되어 그 사람 없으면 못 살게 된다. 타자에 중독되면 잘 늙기 어렵다. 대상에 매이지 않으면 자유로워진다. 담배를 끊으면 흡연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술을 끊으면 음주습관으로부터 벗어나니 자유로워지고, 이성에 대한 욕구를 접으면 이성 앞에서도 초연해지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사람의 삶이라는 게 인연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데 연이 다하면 터는 것이 좋다. 괜히 연이 다했음에도 그것이 세세손손 지속될 것으로 생각해 처자식을 볶을 필요가 없다. 타자와 얽히지 말자. 먼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타자 때문에 울 필요도 없고, 웃을 필요도 없고, 화를 낼 필요도 없고,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다.
타자와 얽히지 않으면 나만 남는데?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젊은 시절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실현에 힘쓰는 건 인생동력도 되고 보기도 좋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실현을 시도하는 건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사실 ‘나’란 허깨비 같은 것이다. ‘나란 없는 건 데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諸法無我) 기독교에서는 나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등장한다. 곧 죄의 산물이 나다. 나로서 하는 모든 행위는 부질없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존재감을 살리지 않는 게 좋다. 나를 세우기 위해 허풍을 떨고 잘난 척을 하면 그나마 있는 사람도 다 떨어져 나간다. 가장 먼저 집사람이 개무시한다. 
내가 허깨비 같은 것이라면 나는 왜 생겼을까? 그건 두려움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울타리며 방벽이다. 곧 외부로부터 눈을 감기 위한 차단막을 치는 것이다. 자신을 닫게 하는 기재가 ‘나’다. 그런 울타리를 왜 칠까? 그건 외부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때 외부란? 철학자들은 그걸 절대타자(신)라고 한다. 절대타자와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차단막을 쳤는데 그 차단막이 ‘나’다. 원래 인간은 개방적이었다. 개방적인 존재가 폐쇄적인 존재가 되면서 인간은 교만해진다. 자부심, 교만함은 약함의 상징이지 강자의 덕목이 아니다. 세상에서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교만함(자부심, 자존심)이 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신과의 관계에서 교만함은 약함을 의미한다. 겸허함이 강한 것이다. 신이 불러도 물러서지 않고 가까이 있게 해주는 것이 겸허함이니까.
타자와 얽힘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두려움도 버리면 남는 건 뭘까? 이 글에서는 겸허함이 남았다. 그 이상은? 글쎄. 너무 힘들지 않을까? 신을 넘는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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