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지방백자의 변화를 알려주는 청주 후기리 백자가마터
조선 중기 지방백자의 변화를 알려주는 청주 후기리 백자가마터
  •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 승인 2022.05.2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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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청주의 북쪽 끝자락 산악지대에 위치한 오창읍 후기리에는 청주시에서 추진중인 제2매립장 조성사업이 한창이다. 이에 지난 2020년에는 매립장 조성 이전에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필자가 조사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발굴조사 되었다.

백자가마의 구조를 단순하게 보면 불을 지피는 아궁이-백자들이 소성되는 번조실-연기가 나가는배연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후기리 백자가마는 아궁이와 번조실의 대부분이 후대의 과수원 조성으로 인해 결실되어버려 번조실 2칸 정도만 잔존하였으며, 출토 백자 또한 발·접시·종자·잔 등 반상기명으로서 그 종류가 단순하고 출토량이 다른 가마터에 비해 소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청주 후기리 백자가마의 의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청주 후기리 백자가마를 통해 조선 중기 충북지역 지방백자의 끝자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백자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시대 백자는 전기와 중기로 분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백자의 중기와 후기를 나누는 경계는 18세기 중반 경기도 광주 분원리에 사기소가 고정한 것을 중요시점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발굴조사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청주 후기리 백자가마에서 출토된 백자들의 기형 분석을 하고 그 특징을 살펴보니, 청주 후기리 백자가마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단계인 18세기 중반 경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 운영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그동안 충북 지역에서 발굴조사된 조선 중기 백자가마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로서, 충북 지역 조선 중기 지방 백자의 중기·후기 시기구분에 분기점을 마련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후기리 백자가마의 성격은 무었일까?

조선 중기 끝자락에 이르면 조선 사회는 전란 이후 농경지의 복구, 생산인구의 확보 등에 상업과 수공업의 활동이 크게 촉진되었고, 화폐의 유통과 운송활동의 증대되었다.

이에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장시가 형성되었는데,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는 전국의 장시 수를 1,062기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장시들은 서로 장날을 달리하여 연계관계를 맺고 있으며, 강경, 공주, 충주, 청주, 안성과 같은 대장(大場)을 주변으로 소장(小場)들이 에워싸고 있는 권역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백자에 있어 주요한 변화는 전란의 폐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분원의 운영 안정화를 위해 분원 전속장인을 확보하고자 분삼번입역제에서 통삼번입역제로 바뀌게 된 것이 있다. 즉, 숙종23년(1697) 경 분원의 운영체제가 각 고을의 장인들이 교체 입역하던 것이 분원의 장인 전속제로 바뀌게 된 것인데, 이로 인해 분원사기장은 분원 주변에서 살게 되었고, 지방사기장은 분원 공역에서 벗어나 지방에 가마를 열어 지방백자의 제작과 유통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검토하면 후기리 백자가마는 뗄감이 풍부하며 생산품의 수요처와 가까운 지금의 청주 오창읍 후기리 산지지역에 자리하고, 민간의 수요에 따라 주로 반상기명을 생산하여 인근의 청주와 안성 등 대장(大場)이나 이를 에워싸고 있는 병천장·오창장·진천읍장 등 소장(小場)에 상품으로서 백자를 생산·판매하던 지방가마였다.

이처럼 후대에 훼손되어 그 원형이 얼마 남지 않은 유적일지라도 유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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