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기우제 전통
충북의 기우제 전통
  • 이승훈 충북도학예연구사
  • 승인 2022.05.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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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승훈 충북도학예연구사
이승훈 충북도학예연구사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가뭄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큰 위기였다. 가뭄을 극복할 수리시설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에 이를 극복할 방법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기우제는 국가나 행정기관에서 지내는 관기우제와 민간에서 지내는 민간기우제로 나눌 수 있는데, 특히 민간기우제는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다.

충북 내에서도 지역과 주변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의 기우제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음성군 부용산 아래에 있는 샘에서는 예전부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는 여자들만 가서 지내는데 속옷만 입고 샘물의 물을 다 퍼낸다. 그리고 맏며느리인 사람이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소나기 온다. 소나기 온다. 3일 이내에 비가 오겠냐, 안 오겠느냐”하면서 주문을 외운다.

기우제를 지내고 마을로 내려와서도 솥뚜껑을 머리에 쓰고 집 주변을 돌면서 물을 끼얹으며 비가 오기를 기원하였다.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와 초평면 연담리 사이에 있는 소두머니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

소두머니는 미호천의 상류로 깊은 냇물인데 이곳에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두머니 동쪽에는 청룡신당을, 서쪽에는 백룡신당을 세우고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주민들이 냇물에서 도리깨질을 하였다고 한다.

증평군의 대봉산은 명당으로 유명한 곳으로 예전부터 밀장(密藏)이 잦았던 산이다. 그런데 이 산에 밀장을 하게 되면 인근 지역에 가뭄이 든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가뭄이 들면 대봉산에서 생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충주시 목계나루터에 있는 목계솔밭은 기우제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목계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냈으나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촌장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저우내에 용이 머물 수 있도록 솔밭을 가꾸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목계와 저우내 두 마을은 마을과 강의 중간 지점에 소나무를 심었더니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런 효험을 보고 두 마을에서 서로 솔밭을 관리하려고 하다가 저우내 사람들이 패배하여 이후부터 목계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솔밭이 가꾸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기우제 때문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예도 있다.

숙종 6년(1689년) 청주에 유생 박상한은 기우제에 사용할 기우제문을 쓰면서 나라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썼다.

이 제문이 문제가 되어 박상한은 의금부로 압송되고 추국한 지 나흘 만에 처형된다.

이 사건으로 청주목은 서원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최근 전국적으로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청주와 증평, 영동은 이미 가뭄 주의 단계에 들어갔다.

농가에서는 밭작물이 말라죽고, 모내기를 할 논에 물을 대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는 하지(夏至) 전에는 지내지 않고, 하지가 지난 뒤에야 지내게 된다.

하지가 지나 기우제를 지내기 전에 힘든 서민들의 심정을 촉촉하게 적셔줄 비 소식을 학수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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