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남쪽 국경선 세종시 남성골 산성에 서서
고구려의 남쪽 국경선 세종시 남성골 산성에 서서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2.05.2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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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대한민국은 `성곽의 나라'로 불린다. 전 세계에서 성곽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의미다.

충북은 삼국의 접경지였기에 지리적인 특성상 산성을 많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 대륙과 중국, 러시아 땅까지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은 큰 역사적 자긍심이다. 하지만 한반도 남쪽 어디까지가 고구려의 영토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와 문곡리에 걸쳐 존재하는 산성이 바로 고구려 산성이다. `남성골산성'으로 불리는 금강 유역에 위치한 이 산성은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군사 유적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부에서 바라보면 부강 시내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남서쪽으로 계룡산, 북서쪽으로 조치원까지 보인다.

이 산성은 한성 백제의 멸망과 함께 백제를 뒤쫓아 내려온 고구려 군대가 머물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서울인 한성을 무너뜨리고 백제왕인 개로왕을 죽였다고 한다. 고구려 군사는 한강을 넘어 백제의 임시 서울인 웅진(공주)까지 뒤쫓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골 산성은 남쪽으로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산 위에 만들어져 강을 경계로 하여 후퇴하는 백제군을 쫓아 금강까지 내려온 고구려 군이 백제의 반격에 대비해 강을 경계로 군사가 머물 수 있는 산성을 쌓은 것이다.

남성골산성의 성벽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 기둥으로 목책을 세운 뒤 흙으로 보강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성벽의 모습은 고구려 산성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백제를 쫓아 금강을 사이에 두고 짧은 시간 동안 산성을 쌓은 결과로 보인다. 다만 성 곳곳에 치성을 만들어 방어하기 쉽게 한 점은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보여 준다. 성 안쪽에서는 둥근 구덩이와 토기를 굽던 가마터와 집터가 발견되어 고구려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성터에서 발견된 유물은 철로 만든 무기와 토기가 대부분이다. 이 중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든 도끼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무기이다. 토기는 목이 짧은 항아리와 몸통이 긴 항아리가 많은데 겉면을 닦아 반질반질하게 만들었다.

고구려군이 지키던 이 남성골 산성은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벽을 돌로 쌓지 않고 나무로 목책을 설치하는 등 임시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점이나 성벽 곳곳에서 불탄 흔적이 보이는 점 등은 백제의 반격으로 고구려군이 머문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성골산성의 발견은 그동안 이 지역에서 전해오던 전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용면 일대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여럿 남아 있다.

전설지(충청북도)에 `고구려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왕의 조카 보장을 세우고 나서 신라와 당의 교역로에 위협을 가하면서 오늘의 금강 일대를 장악하고 나서 소문은 중부 지방의 수려한 강산과 천연적인 요새가 많은 것을 이용해서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라고 쓰여 있다. 삼국시대 치열한 경쟁의 현장인 우리 고장은 삼국사기에 충북의 중·북부 지역이 옛 고구려의 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충주 고구려비를 비롯해 충북 지역 곳곳에는 금귀걸이와 금동 광배 등 고구려의 자취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들은 고구려 군사가 내려오면서 남기고 간 흔적으로 이해된다.

남성골산성의 자랑스런 역사를 잘 보존하고 계승하여 미래 역사의 주인공들에게 고구려인들이 가졌던 강건함과 불굴의 의지를 가르치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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