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염색하는 날
머리 염색하는 날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5.2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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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폭이 좁은 계단을 올라가 2층 미용실로 들어선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양쪽에서 사용할 수 있는 책상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왼쪽 첫 번째와 오른쪽 가운데 의자에 손님이 머리를 하고 있다.

창가 쪽에도 핸드폰에 시선을 주고 있는 여자가 한 명 있으나 손님 같지는 않고, 미용사는 남자와 여자 각 한 명씩 둘밖에 없는 듯하다. 스캔 완료,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될 듯싶다.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관자놀이 부근에 흰머리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은 자라 있는 걸 발견했다. 갑자기 당장 염색을 해야만 될 것 같아서 예약 없이 운영하는 미용실을 찾아 여기에 온 것이다.

여자 미용사가 손은 분주하게 놀리면서 눈 맞춰 잠시만 기다리시라 한다.

나는 입구에 놓인 소파에 앉아 들고 온 책을 펼쳤다. 요즘 매일 한 편씩 읽고 있던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다.

언젠가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가 살던 집에 갔다가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문을 닫아걸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다'라는 편액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방이 딱 그렇더란다.

안으로 정갈하고 밖으로 흐드러진 그 방을 떠올리며 거기에서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라는 책을 읽고 싶더라고. 하지만 은유 작가 자신에겐 글쓰기에 최적화된 장소가 카페도 절간도 자신의 방도 아니고, `마감이라는 시간의 감옥'이라고 했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남자 미용사가 오른쪽 가운데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내 머리 색을 확인한 뒤 먼저 이마와 머리의 경계 부분, 귀 뒤, 귓바퀴에 크림을 발랐다. 살에 염색물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정수리부터 염색약을 발라 나가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가르마를 갈라가며 머리카락 한 올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염색약을 발랐다. 손놀림이 얼마나 민첩한지 잠깐 사이에 밑머리까지 전부 다 끝냈다. 이제부턴 기다릴 시간이다.

머리가 참 빨리 자라는 것 같다. 엊그제 염색했던 것 같은데 돌아보니 그게 벌써 두 달 전이다.

잦은 파마와 염색 탓에 머리카락이 힘이 없고 부석거려서 한때는 염색을 안 하고 버텨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얼굴에 흰머리까지 군데군데 희끗거리다 보니 나이보다 훨씬 늙고 초라해 보여서 얼마 못 가 결국 또 미용실을 찾고 말았다. 언제쯤이면 남들 시선에 초연하게 될까.

뿌리 염색하는 날이면 종종 마음이 조급해지곤 한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남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리는 것 같아서다.

시간의 속도를 미처 생각이 따라잡지 못해 오는 차이가 조급함인 듯싶다.

차라리 반백이 넘어 더는 염색하지 않아도 될 즈음이면 조급함이 사라지려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 타인을 의식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 그러니 여유를 갖자. 생각하던 끝에 뭐가 하나 걸린다. 마감이 코앞인데 글이 영 안 써지던 차였다.

주제는 있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쓰고 싶어 쓸 때는 의미화 부분이 좀 약해도 개운하게 마무리되던데, 아무래도 지금 쓰고 싶은 글이 아닌가 보다.

어쩌면 오늘 흰머리가 눈에 거슬린 것도 이것 때문이었지 싶다.

그럼 이제 무얼 쓰지? 머리 색은 잘 나왔는데 맘이 아직 복잡하다. 그러다 문을 나서며 문득 오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걸음이 빨라지고 머릿속에선 생각의 그물이 부지런히 얽혀간다. 나의 심산 역시 마감이라는 시간의 감옥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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