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그날을 기억하는 일
5월, 그날을 기억하는 일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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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사람들은 다시 광주로 내려간다.

어언 42년의 세월이 그날의 기억을 당당한 청년의 나이가 된 딸들에게 해마다 거듭 들려주는 일이 차라리 마땅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막 20대에 접어든 애틋한 청춘의 시절, 5월 그날을 앞두고 학교 앞을 장갑차와 군인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새벽, 숨죽이며 하얗게 동이 틀 무렵까지 눈물로 교문을 바라봐야만 했던 일이 엄청난 비극의 전조였음을 그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뚜렷하지 않은 공포로 까닭 없이 몸을 숨겨야 했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신념은 바람결에 흘러오는 보통 사람들이 숫자를 알 수 없을 만큼 죽어 나갔다는 소식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반도의 남쪽 나라는 그러고도 몇 해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런 희생은 항상 권력의 자리와는 먼 곳에서 스스로 분연했고 슬픔은 온통 그렇게 죽어간 보통 사람들의 가족들 몫이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망월동에서 맞닥트린 거대한 첨탑의 위용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조형물은 고향을 지키고, `조국과 민족' 민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보통의 시민들의 마음을 얼마나 담을 수 있겠는가. 그 거룩하고 숭고한 보통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상징적 권력의 자리를 누리고 있는 이들의 가슴엔 오늘, 5월 18일이 어떤 의미로 담겨 있을지 못내 궁금할 뿐이다.

모든 혁명이, 모든 분노와 저항, 전쟁까지도 공포와 희생은 언제나 보통사람들의 몫이었고, 절망과 비극 역시 언제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맨 앞에서 절규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차지였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뒷전에서 지도와 지휘를 자처하다가 살아남은 자들은 대개 항쟁의 주역이 되어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고, 다만 거룩하고 숭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자리엔 의례적인 기억의 되새김이 습관적 절차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지극히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마다 5월 그날이 되면 곁에 있다 지금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보통의 사람들의 비극에 몸서리치는 서러움이 도지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태 뚜렷한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책임의 정점으로 지목되던 자가 자연사하는 오욕의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은 “싸우지 마라.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고, 맞은 사람은 발 쭉 뻗고 잔다.”는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받으며 자랐다. 폭력에 휩쓸리지 말고 억울해도 참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은 그러나 양심이 살아있는 세상에서만 가능하다.

5.18과 세월호, 4.19는 물론 일제의 온갖 만행마저도 가해자의 반성도, 사과도 없는 세상에서 보통사람들의 평화와 자유는 그 누가 만들어주지도 지켜주지도 않는다.

적어도 명령에 의해 편이 갈려 시민들에게 총을 쏘아야 했던 진압군의 평범한 의무 복무자들마저도 침묵하거나, 절대 권력의 편에 서서 날조와 왜곡에 앞장서는 무리들을 사회 지도층에 남겨두는 세상은 억울하다. 그러므로 5월, 그날을 기억하는 일은 광주에서, 망월동에서 아스라한 전설처럼 기억하는 상투적인 통과의례로 남을 일은 아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다시 광주로 간다. 5월을 토착 권력의 욕망으로 이용하거나, 진정성 없이 보여주기식의 의식절차를 통해 믿음을 갖게 하려는 권력의 보이지 않은 간계를 미리 알아차리는 능력은 보통사람들에겐 없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되풀이하지 않는 길은 원인과 가해의 책임을 철저하게 물어 반성과 사과를 거친 뒤 피해자의 용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

공교롭게도 수요일이 5.18과 만나더라도 그날의 기억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불편하지 않는 세상을 나 또한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5월 그날은 그저 의식 절차처럼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고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날이어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처럼 뜨거운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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