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초여름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2.05.1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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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매화부터 시작된 봄은 벚꽃으로 정점을 찍고 복사꽃을 지나 철쭉에 이르면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된다. 아카시아 향기가 차창 사이로 들어와 코끝을 스칠 때가 되면 여름이 코앞까지 와 있다고 보아도 된다.

여름 분위기는 봄과 확연히 다르다. 신록을 지나 짙어진 녹음과 무성한 잎들로 둘러싸인 꽃들은 부쩍 성숙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고려(高麗)의 시인 곽예(郭預)는 초여름의 분위기를 나름의 감각으로 잡아내었다.


초여름(初夏)

千枝紅卷綠初均(천지홍권녹초균) 가지마다 붉은빛 가고 초록빛 막 감도는데
試指靑梅感物新(시지청매감물신) 푸른 매실 시험 삼아 만져보니 느낌이 새롭구나
困睡只應消晝永(곤수지응소주영) 곤한 잠만이 긴 낮을 보내는 수단일진데
不堪黃鳥喚人頻(불감황조환인빈) 노란 꾀꼬리가 사람을 부르는 것을 어쩌랴

시인이 보기엔 봄과 여름은 빛깔이 다르다.

봄이 붉다면 여름은 푸르다. 붉은 꽃들이 어느덧 지고 나면 세상은 온통 푸른 잎들이 지배한다.

가을이 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초여름부터 결실은 시작된다. 매실이 파랗게 익어 가는 것이다.

시인은 살이 오른 매실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보고는 이제 정말 봄이 가고 여름이 왔음을 실감한다.

시인에게 봄이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다. 대신 갓 도착한 여름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하다.

길어질 대로 길어진 여름 낮은 낮잠을 한 번 곤히 자고 나면 쉽게 지나갈 것이니, 전혀 걱정할 게 못 된다.

그런데 문득 걱정 아닌 걱정거리가 시인의 뇌리를 스쳐 갔으니, 여름 낮에 들릴 꾀꼬리 울음이 그것이었다.

시인은 꾀꼬리 울음이 여름 낮잠을 방해한다고 했지만, 기실 이들 둘 다 시인이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시인에게 안긴 것은 바로 여름이라는 반가운 손님이다.

보통 사람들은 여름이 오는 것을 반기기보다는 봄이 간 것을 아쉬워한다. 봄이 매력적인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여름이 천덕꾸러기인 것은 결코 아니다. 짙은 숲과 긴 낮을 선물로 주는 여름도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일 것이다.

푸념할 시간에 즐길 줄 아는 인생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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