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습관
아버지의 습관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2.05.16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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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지인으로부터 사진 한 장이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빨간색 오토바이 뒷좌석에 하얀 노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초코파이 상자였다. 무슨 사진이냐고 물었더니 친정아버지께서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딸들 주려고 근처 마트에서 사 온 것이란다.

어릴 적 어린이날이면 고추밭에서 딸들과 함께 고추 모종을 심고 난 후 초코파이를 사 주었던 기억을 되살려 자식들이 다 큰 지금까지도 어린이날이 되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마트에 들러 초코파이를 사 들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지인과 그 아버지와의 각별했던 시간은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본인이 일하고 있는 한의원에서 아버지의 보약을 지어드리려, 시간 날 때 한 번 다녀가시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며칠 후 전화 연락을 하고 아버지가 오시기로 했는데 올 시간에 맞춰 창문을 내다봤더니 저 멀리서 아버지가 신호등 앞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이 보이더란다.

그런데 길을 건너기도 전에 신호등의 불이 바뀌고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차량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어찌나 짠해 보이던지 코끝이 찡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가 그림처럼 내 머릿속에도 지금까지 각인이 되었다.

지난주에는 어버이날이라 붉은색 카네이션 화분을 사 들고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수년 전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한쪽 손과 한쪽 다리가 불편해 생활의 많은 부분이 제약을 받는 와중에 당뇨까지 겹쳐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오가며 사시는 아버지를 뵈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장기간의 코로나로 인해 만나지 못했던 시간의 공백만큼이나 아버지 눈에서는 반가움이 역력했고 코로나의 후유증인지 더없이 노쇠해진 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한없이 헌신하고 아낌없이 퍼 주던 가시고기 같은 존재의 아버지였는데 그 끝은 온갖 병마에 늙음만이 남아버렸다.

그래도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검은색 볼펜.

어릴 적 아버지는 시(詩)를 좋아하셨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이 늘 농사일로 종종걸음이셨지만 저녁이면 늘 형광등 불빛 아래서 펜을 드셨다.

벽에 걸린 달력을 내려 방바닥에 깔아놓고 뒷면에 시를 쓰면 나는 옆에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글자를 곁눈으로 읽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무슨 뜻인지를 묻고 아버지가 답하던 시간. 당신의 첫 독자로서 함께 시를 읽던 지난날의 추억은 아직도 내 인생의 보약이다.

시간이 흐르고 집을 떠나 멀리에서 출가외인으로 살고 있을 적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시를 쓰셨고 어느 날 『지역주민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며 반가운 소식을 알려왔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읊었다는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몹시도 마음에 드셨는지 책자 반 페이지 정도 심사평을 다 외우고 계셨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펜을 드셨고 어딜 가든 수첩을 들고 다니셨다.

이제는 기력이 쇠해 대부분의 일상에서 거의 손을 놓으셨다. 농사도 모두 접으셨고 하루 대부분을 집과 병원 오가는 일로 채우신다. 그래도 딱 하나! 놓지 않는 아버지의 습관. 시간이 날 때마다 툇마루에 앉아 펜을 잡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리고 눈빛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누구든 아주 작더라도 저마다 하고 싶은 한 가지 일만 있다면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오래오래 시를 쓰는 일에 손을 놓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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