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의 기억
전통시장의 기억
  • 김일복 시인
  • 승인 2022.05.15 18: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김일복 시인
김일복 시인

 

“벌써 오후 한 시가 넘었네. 뭘 먹을까?”

“별로 먹고 싶지 않아! 배고픈 것보다 시장에 오는 게 더 힘들어!”

큰딸의 투정 어린 말투에 내심 걱정스럽다.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한 달에 한두 번은 육거리 시장이나 북부시장을 가곤 했다. 건물 사이사이 할머니들의 삶의 터전이 있다. 노상에 앉아 깻잎, 시금치, 깐 마늘, 대파 등을 펼쳐 놓고, 이삼천 원 하는 채소를 팔고 있다. 참기름, 들기름은 팔아도 양심은 안 판다며 국산만 고집하는 시장 아저씨도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청국장만 팔아서 아들 대학부터 결혼식도 치렀다는 할머니도 있다.

시장 속에는 언제나 에너지가 있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깎아달라며 상인과 아옹다옹하고, 고된 노동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에게는 꾸준한 근면성이 있다. 시장에는 푸짐한 행복이 있다는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체험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크길 원했다. 아이들에게 늘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사회에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건강한 학습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단단한 힘을 갖게끔 했다. 사람들과 함께 웃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부모로서 거울이 되고 싶었다.

“아빠! 이제 시장 구경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아빠 의도는 충분히 알겠어!”

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 내게 한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이미 가치관이나 자아 정체성이 형성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 입장에 서서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혼란을 준 것은 아닐까? 나의 욕심이었을까?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커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혹시 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나의 낡은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잔소리만 한 것은 아닌지 참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미국의 작가 조셉 칠튼 피어스 (Joseph Chilton Pearce)는 인간 발달과 아동 발달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우리 말보다 우리의 사람됨”이 아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바라는 바로 그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보다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비추어야 한다. 정성스럽게 참된 삶을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바른길로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다.

시장에 가면 없는 게 없다. 우리가 필요한 상품을 편리하게 살 수가 있다. 사고, 파는 것이 물건만은 아닐까 싶다. 어쩜 배고픔을 사고팔고 하는 곳일 수도 있다. 그래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다. 상품에만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닌 삶의 가치에 기준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이 될 때 시장은 진정한 삶의 양식이며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시장 속에는 지혜로운 꿈이 있다. 꿈은 살아가는 데 희망이 된다. 또다시 기억 하나가 꿈틀거렸다.

어느덧 큰 아이가 결혼했다. 큰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빠 그때 귀여웠어.”

“요즘도 시장 구경을 다니나?“

큰아이는 아름답고 풍성한 추억이라 말한다.

마냥 내 고집은 아니었나 보다.

딸과 다니던 전통시장엔 향기가 있고, 시끌벅적한 정(情)이 있고, 따뜻한 세상이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