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실존적 자리
학교의 실존적 자리
  •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 승인 2022.05.1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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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오래전 가르쳤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가끔 결혼 주례를 부탁한다. 주례는 서 주겠지만 한편에는 두려움 마음이 있다. 주례를 부탁하는 당사자는 어릴 적 선생이었던 나와 학교생활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기에 주례를 부탁하겠지만, 그날 결혼식에 온 그의 친구들은 선생이었던 나와 학교에 대해 어떤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결혼식을 마치고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학교라는 곳은 학생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으며 그들의 삶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그리고 교사는 학생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학생들의 삶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그들에게 있어 학교와 교사의 실존적(實存的) 자리는 어떤 모습인가.



# 심리적 주둔군

삶이 너무 힘들 때,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다시 살아갈 회복 에너지를 갈구할 때 찾아가는 장소는 어딜까.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장소일까 아니면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과 기억이 있는 장소일까.

개인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지만 대개는 뭔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갔던, 쓰라림과 힘듦, 고통과 갈등이 있었던 장소를 찾아간다. 행복했던 경험 들을 떠올리며 자기회복 기능을 발휘하기보다 오히려 힘들었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기를 방어하고 치유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이다.

한 부부가 60평 아파트에서 잘 살아가다가 회사가 부도를 맞아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그들이 힘을 얻기 위해 찾아간 곳은 신혼부부 시절 단칸 셋방살이를 하던 집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치열하게 살며 60평 아파트로 옮겨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종종 TV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정신의학자 프로이트(S. Freud)는 이러한 현상을 `주둔군 이론'으로 설명했다. 전쟁에서 군인들이 전투하면서 고지를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마다 점령한 고지에 얼마씩 주둔군과 물자를 배치한다. 가장 힘들게 점령한 고지는 그만큼 중요한 고지이기에 그곳을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은 주둔군과 장비를 남겨둔다. 그런데 군인들이 전투하다가 패하여 후퇴하거나 재정비를 위해 휴식을 취해야 할 때는 가장 치열한 전투를 해서 점령했던 그 고지를 찾게 된다. 가장 많은 주둔군과 물자들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안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여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다.



# 학교의 실존적 가치

지독히 어려웠거나 심각한 심리적 외상을 입은 시기와 장소라면 차라리 피하거나 잊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가운데서도 치열하게 살아내어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기는 것은 전투에서 어렵게 고지를 점령하는 것과 같다. 살면서 유난히 힘들었던 그 지점에는 자신의 심리적 주둔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는 인생의 막막함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던 열망과 노력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절박함 속에서 쥐어 짜냈던 강렬한 에너지는 회복탄성력(resilience)l을 높여준다.

진짜 행복한 학교는 학교가 학생들에게`심리적 주둔군'으로 남는 것이다. 졸업을 하고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힘들고 지칠 때, 세상 불의와 맞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다 포기하고 타협하고 싶을 때, 그들이 이상을 쌓아가며 실패와 성공 경험을 하며 치열하게 생활했던 학교가 그들의`심리적 주둔군'이 되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곳, 학교에서 다시 힘을 얻어 주어진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면 좋겠다. 이것이 학교의 실존적 가치라 여겨진다. 그리고 선생 된 그들은 학생들이 그런 경험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그들의 실존적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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