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읽는 날
풀을 읽는 날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2.05.1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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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뿌리지도 않은 씨앗이 자라고 있다. 보통은 싹을 틔우며 떡잎을 달고 나오는데, 이 녀석은 떡잎이 없는지 바로 본잎을 펼쳤다. 그것도 작물 바로 옆에 붙어 자라고 있다. 조금 더 내버려 두었다가는 작물이 치일 듯하여, 조금 더 자란 뒤에 뽑다가 작물까지 뽑힐까 봐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시원스럽게 뽑히지 않았다. 뿌리가 끊겼다. 핀셋으로 헤집었다. 끊어진 뿌리는 작물의 뿌리보다 훌륭한 뿌리털을 가지고 있었다. 쇠비름의 출현이다.

비가 그쳤다. 우후죽순 아니 우후잡초다. 비가 오기 전 싹을 틔운 명아주는 살이 부쩍 오르고 키가 훌쩍 자랐다. 황새냉이는 땅의 빈자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삐쭉 삐죽 빼곡히 꽃을 피웠다. 끊긴 뿌리에서 싹을 내민 제비꽃, 땅을 뒤덮을 기세인 바랭이, 벌레들한테 맛난 잎을 내주고도 덩굴을 올리고 있는 환삼덩굴, 수줍게 꽃을 달고 있는 골풀, 여럿이 어울리는 깨풀까지 꾀 많은 녀석이 존재를 드러냈다. 씨도 뿌리지 않았고 거름을 주지 않았는데 열심히들 땅 밖으로 나왔다. 웃거름 하나 주지 않았다. 작물을 기르려 밑거름을 한 게 전부다. 물도 주지 않았다. 한낮의 뙤약볕에 작물은 시드는데, 줄기는 다부지고 뿌리는 깊고도 넓게 뻗었다.

아이리스는 구슬 치마를 입었다. 하의를 제대로 챙겼다. 20여 미터를 길게 늘어선 아이리스 주변이 온통 쇠뜨기다. 여린 쇠뜨기는 마디마디 빗방울을 달고 꽃을 한 참 피운 아이리스를 감쌌다. 비를 맞이해 싱그럽게 치장을 시켰다. 언제 뽑힐지 모를 불안은 애당초 없다.

비가 그친 아침은 제법 쌀쌀하다. 바람까지 골바람에 가깝다. 냉해로 작물이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땅이 노는 걸 보지 못해 정식을 했다. 예상대로 몇 개 남지 않고 모두 죽어버렸다. 땅에 직접 파종을 한 것이 아니고 하우스 안에서 키운 모종을 옮겨심은 것인데 적응을 하지 못했다. 때가 아닌 걸 알면서 무리를 한 게 화근이었다. 그 옆으로 땅콩이 아닌 심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자라고 있다. 흙에서 나올 때를 기다린 것이다. 때가 아니면 몇 년이고 흙 속에서 버틴다. 불편함을 인내하고 자신을 조심스럽게 보인다.

내 입맛에 맞는 밥상에 오를 먹거리만을 생각하다 보니, 경작지에서 풀은 보이는 즉시 제거 대상이다. 목적에 맞게 재배되는 작물은 채종, 씨앗소독부터 파종, 모종관리, 시비에서 수확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다 받는다. 흙의 성분, 토질, 수분의 함량까지 체크하며 관리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잡초는 산성토양이든 알칼리성 토양이든 가리지 않는다. 땅이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데로 딱딱하면 딱딱한 흙에 맞춰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친다. 오히려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눈에 띄어 뽑혀도 제초제가 아닌 이상 전멸은 없다. 설령 제초제를 뿌려 전멸시켰다지만 얼마 안 있어 싹을 올린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싹을 올리고 뿌리를 내린다.

풀은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러니 선택받아 키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키우고 있는 화초들은 이름이 있어 화초지, 다 풀(잡초)이었다. 재배되면서 개량되면서 귀한 존재처럼 되었다. 보기가 좋아, 희귀해서, 좋은 성분을 가지고 있어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풀(잡초)이 좋은 성분을 없는 것은 아니다. 식감이 좋지 않아 손이 더 많이 가서 그렇지 더 많은 효능과 성분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과하게 포장하여 드러내지 않는다.

강한 생명력과 효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편협과 과장이 난무한 세상에 무던하게 침묵하고 있는 풀은, 때를 기다릴 줄 안다. 짜인 인위적 선택과 억지스러운 방향이 아닌 다양한 상황에 적응하며 풀은 자란다. 풀은 우리가 이름을 잘 몰라, 약효를 잘 몰라, 싸잡아 풀(잡초)로 불리며, 목적물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죽지 않으며, 침묵하고 자신의 역할을 할 뿐이다. 무던하게 버티며 죽어가는 땅을 살리는 치료약이다. 미천하지만 지치지 않는 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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