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2.05.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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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강원도를 여행 중이다. 봄의 절정인 연두 빛은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눈이 부시도록 생동감을 불러왔다. 그러나 산이 가까운 숙소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그만 무언가에 짓눌릴 만큼 무거운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잎을 틔우지 못한 검은 나무들이 놀라울 정도로 처연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 뜨거운 고통을 지금도 몸으로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연일 이어진 뉴스의 현장을 기억해낸다.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긴 산불로 인한 피해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접하게 될 줄은 예상 못하고 떠나왔던 것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오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며 순간 여행의 여유가 슬그머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직접 피해를 겪은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다.

지워지지 못한 산불의 흔적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무들이 죽은 몸을 지탱하면서 떠나지 못한 체 부르짖는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듯했다. 불길을 막아서지 못하고 스러질 수밖에 없었던 급박한 상황이 저 연두 빛과 극한 대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또렷하게 가까이에서 보고 만 셈이다.

나무들이 살아있을 때를 상상한다. 얼마나 청정하게 하늘을 받들고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화마를 겪으며 뿌리를 둔 자리에서 그래도 아직은 세상을 향한 그 어떤 미련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갑자기 나무를 향해 뛰어가 한바탕 눈물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다. 나무의 영혼을 향해 한없는 위로를 건네고 싶은 충동에 잠긴다. 외롭게 서있는 검은 나무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떠난 사람인양 아쉽기가 그만이었다.

굳어 있는 나무의 가지 끝에서 한 줄기의 생명을 발견한다. 어떻게든 한참동안만이라도 제자리를 지키며 본래의 형상으로 지탱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다. 문득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의 생전 모습이 가깝게 떠오른다. 그분들은 지식도, 부요도 거리가 멀었던 현실이었다. 그러나 시대를 살아왔던 지혜는 자식들에게 언제나 본보기로 남아계신다. 생명이 떠난 나무를 보며 부모님의 푸르른 시절을 찾아가 모셔 들이고 싶은 순간이다.

조금씩 시야가 넓어져가고 있다. 미완으로 이어져왔던 하루하루의 내 삶에서 궁극적인 방향을 찾아야 하는 새로움이 싹터온다. 나 역시도 자연의 일부가 확실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대로 보거나 듣지는 못해도 그 이치에 합당한 이유를 지닌 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자연과 우리는 필요불가결의 관계였다. 그러나 이렇게 화마의 재난만큼은 어떤 상황이든 겪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자리를 잡는다.

유구한 성지 같았던 푸른 산야가 무척이나 그리운 오늘이다. 다행이도 초록은 멈추지 않는 걸음으로 몸짓을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변하는 세월을 붙잡기 위해 나도 바쁘게 뒤 ㅤㅉㅗㅈ아 가고 있는 중이다. 화마의 흔적위에서 그래도 꽃은 피고 지며 계절은 거듭되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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