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달리기
이어달리기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2.05.05 17: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봄꽃이 환하다. 오밀조밀 모인 아이들이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인다. 일주일에 세 번 초등학교에 학습 도움 교사로 가기 시작했다. 교실이 텅 비어 있어서 밖으로 나오니 운동장으로 3학년 전체가 모여 있었다.

체육 활동을 이끄는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켜고 주의사항과 활동방법에 대해 말씀하셨다. 선생님 손에는 노랑, 빨강, 파랑의 배턴이 있었다. 둥근 원통형의 막대만 봤을 뿐인데 흥분되었다. 이어달리기를 하려나 보다. 첫 주자와 마지막 주자를 정하고 배턴을 넘겨받는 방법을 여러 차례 설명하신 후 드디어 각자의 자리에 섰다. 게임에 이기고 지는 건 없다며 모두를 응원하라는 당부를 하신 후 호루라기를 불었다.

운동장을 신나게 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이 아이들은 코로나 첫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벽에 부딪혀 입학의 설렘과 기대감은커녕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마스크를 쓰는 게 오히려 익숙해진 아이들과 방과 후 수업을 재개했을 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친구들과 공부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그런 사소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아이들이다.

몇 년 만에 운동장에서 들리는 아이들 함성에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까지 나와서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한번 하자고 아우성친다. 선생님은 흔쾌히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셨다. 아이들이 땅을 밟으며 뛸 때마다 먼지와 함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달리기가 끝난 후 교장 선생님께서 상으로 초콜릿을 주셨다.

그날 아이들의 이어달리기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학창시절 가장 기다리고 즐거웠던 때는 운동회이다. 운동회의 꽃은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정해져 있던 이어달리기이다. 나는 체육을 못 할 뿐 아니라 달리기는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지막 이어달리기에 나온 친구들을 응원하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이어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 주는 일이다. 배턴터치를 잘 못 하면 순위가 바뀌기도 하고 그대로 경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3년 만에 운동장에서 뛰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괜히 슬픈 감정이 차올라서 그런지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 시청했던 시사프로그램이 맴돌았다. TV 프로그램 중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시즌 2까지 이어질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 명의 이야기꾼이 사건의 진솔한 내면을 보여주며 감정이입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드러난 사건의 허상보다는 그 사건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챙겨 봤다. 지난번에는 1987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고문사건 이야기를 다뤘다. 그 사건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역대급 계주에 뛰어든 사람들 이야기였다. 독재를 무너뜨린 비둘기 작전에 6개월간 수십 명의 사람이 배턴을 이어받으며 민주화를 건 레이스가 펼쳐졌다.

위험한 순간에 갈등을 겪으며 마지막에는 용기를 내어서 다음 주자에게로 끊이지 않고 이어진 진실이 `민주화'라는 큰 힘을 발휘했다. 세상일 돌아보니 이어달리기처럼 배턴을 넘겨주는 많은 일이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코로나라는 큰 위기를 넘길 때도 수많은 봉사자가 있었고, 곳곳에 숨은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배턴을 손에 꽉 쥐고 힘차게 달리는 아이들이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기면서 숨을 고른다. 이 아이들은 과연 어떤 자리에서 이어달리기하고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