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화차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05.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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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들판에 싸리꽃이 하얗게 피는데 왜 내 가슴이 떨려오는가. 어찌하여 마음이 울렁이는가. 가만히 있어도 물결이 인다. 그 위로 햇살이 내려앉아 별처럼 빛난다. 윤슬, 지르르 화한 빛이 내안에 지름불을 밝힌다. 꽃이 속에서 팝콘처럼 터진다. 미명의 새벽이 걷힌다. 어둑어둑하던 길이 훤해지고 또렷해진다.

이런 날은 달리고 싶다. 속도가 주는 짜릿한 전율, 한번 느끼면 점점 감각이 무뎌져 더 가속도가 붙는다. 계기판을 보고서야 놀라게 될 때가 많다. 평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운전대만 잡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폭군으로 변하여 과격해진다. 이런 내가 종종 낯설다. 언제부턴가 운전석에 앉으면 겁이 없어지는 고약한 버릇이 생겼다.

5년 전 사고 나던 날도 싸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서둘러 기다가 사거리의 신호가 바뀌면서 미처 서지 못해 앞차를 들이받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약속시간에 빠듯하여 급한 마음이 부른 결과였다. 차는 폐차를 했고 지금 타는 차로 바꾸었다. 한참을 몸져누워 앓았건만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던 게 또 다시 화근이 되었다. 일주일 전 퇴근길에 똑같은 사고를 냈다.

첫 번째보다 더 충격이 셌다. 깜박 정신을 잃고 깬 순간, 내 차가 앞차를 박고 있었다. `아. 내가 또 사고를 쳤구나' 판단이 서자 정신이 났다. 나를 억지로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가 사고를 수습해야 했다. 다행히 운전자는 많이 다치지 않아 보인다. 보험을 처리하고 마무리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놀란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해 댄다.

아직도 뛴다. 이제 운전석에 앉으면 겁부터 나기 시작한다. 모든 차들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올 것만 같다. 1차선으로 내달리던 내가 2차선에서도 쩔쩔맨다. 이렇게 천천히 가도 사무실에 도착해보면 10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건만 왜 그렇게 달렸을까.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액셀을 밟았을까. 어디선가 끝을 알리는 주문의 소리를 듣는다. 매직에서 풀려나 베일을 벗는 느낌이다.

어쩌면 사고는 늘 예견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다. 조금 천천히 가도 늦지 않는 길을 조바심을 냈다. 제한속도를 지키려고조차 생각지 않고 시시로 속도위반을 한 것이다. 달려야만 승리를 거머쥐는 카레이서. 스릴을 즐기는 폭주족인양 달렸는지 모르겠다. 아마 도로교통법 제17조 3항에 의해 범칙금이 발행되었다면 생각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액수다.

4월의 어느 날, 화차(火車)가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불교용어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수레다. 한번 탄 사람은 결코 도중에 내릴 수가 없다고 한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차(火車)를 향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이 되어 화염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흠칫, 날개에 화기(火氣)가 닿자 놀라 식겁한다. 날갯짓을 접고 가쁜 숨을 고른다. 이제 질주가 끝이 난다.

`그래, 이 나이에 꽃이 피었다고 떨려온 가슴이 문제였던 거야. 그 누가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 간 줄 알았다 했던가. 나도 그렇다.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간 한 철이다. 거기를 지나 가뭇하게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 와 있다. 오히려 꽃이 고와 서러울진대 울렁거린 마음이 말썽이었던 거야'

우연의 일치였을까. 징크스일까. 세 번의 사고가 있을 때마다 꽃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곤 마구 쑤셔놓아 멀미를 일으켰다. 이대로 뛰노는 가슴에 휘말려 비아부화(飛蛾赴火) 할 수는 없다. 남은 인생이 궁금해서 더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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