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사느냐 죽느냐’다
전쟁은 ‘사느냐 죽느냐’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2.05.0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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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남자들이 말이 길어질 때는 단연코 군대 이야기를 할 때다. 실제 전쟁을 치르진 않았어도 군대에서 실제와 같은 훈련을 받으며 쌓인 전우애 때문이리라.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무렵 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강원도 쪽으로 피서를 가곤 했다. 그때는 고속도로가 지금처럼 잘 닦이지 않아 국도로 가는 길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강원도의 인제 부근을 지나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의도적으로 그쪽을 경유지로 택한 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남편은 인제 부근을 지나가게 되면 한 시간 가까이 군대얘기를 하느라 바쁘다.

오늘은 독일 출생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었다. 전우애란 전쟁에서 함께 싸운 동료와 나눈 정이다. 그것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말이다. 왜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전쟁이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런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이다. 자신이 왜 싸워야하는지, 또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서는 사실 적군이 누구고 아군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차분하게 들려준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울분이 인다. 누가 옳고 그른지도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전쟁의 속성이 그런 것은 아닐까. 누가 옳은지도 그른지도 모르면서 그저 싸워야 하는 것, 정신이 마비되어야 제대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것, 결국 전쟁에서는 이성과 지성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울 보이머도 그랬다. 어느 날 공격을 피해 숨어 있던 자신의 구덩이로 프랑스 병사가 떨어지자 겁에 질려 칼로 찔러 버리고 만다. 사실 파울은 그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찔러댄 병사가 죽어가는 동안 파울은 그 병사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물도 준다. 그렇게 칼로 찌른 파울과 칼에 찔린 프랑스 병사는 한 구덩이에서 전우가 된다.

파울은 프랑스 병사의 군인 수첩에서 그가 인쇄공이며 이름은 제라르 뒤발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파울은 어쩌면 자신이 이 전쟁에서 살아나간다면 죽은 병사의 아내와 아이와 부모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프랑스 병사의 주소를 연필로 쓰고 자신이 인쇄공이 되어야 한다고 되뇌었을 것이다. 파울은 프랑스 군인에게 `전우'라고 부른다. 상대는 더이상 적이 아닌 같이 전쟁에서 싸우는 동료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가을 어느 날, 동급생 일곱 명 중에 혼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파울에게 들려오는 평화와 휴전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희망이 아니다. 파울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도 기대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온 전선이 쥐죽은 듯 조용하던 어느 날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사령부 보고서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 적힌다.

만약 파울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삶은 장밋빛이었을까. 아마도 온전한 삶을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의 무모함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1929년에 발표되었다. 사실 이렇게 오래된 소설이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시시각각으로 뉴스를 장식한다. 전쟁은 왜, 누가, 무엇을 위해 일으키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자신이 사랑하고 책임지고 보호해 줘야 할 국민을 위하는 길인지 캐묻고 싶다. 국가의 권력 앞에 국민의 생명은 아무런 가치도 없단 말인가. 결단코 전쟁은 패자도 승자도 없는 무의미한 싸움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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