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미역국
엄마의 미역국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4.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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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미역국을 끓인다. 엊저녁 삶아뒀던 소고기는 건져 찢고, 미역은 불려서 넣고, 다 끓으면 마늘 조금 넣어 국간장으로 간만 맞추면 된다. 굴이나 홍합을 넣어서 끓여 먹기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양지를 푹 고아서 끓인 미역국이 제일 맛있다. 엄마의 미역국 맛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일과 세 아이 산바라지 때마다 엄마의 미역국을 먹었던 내가 지금은 엄마의 미역국을 끓이는 중이다. 오늘은 엄마의 여든둘 째 생신날이다. 출장 때문에 오빠네는 지난주에 미리 다녀갔고, 동생도 며칠 전 확진 판정을 받아 결국은 남편과 나만 참석하게 되었지만, 그게 오히려 오롯이 효도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 같아 좋다.

아침 내내 주방이 분주했다. 당면 삶아 잡채를 무치고, 밤 대추 얹어 갈비찜도 하고, 두릅도 삶아 놓고, 도토리묵은 채소를 곁들여 양념에 무쳤다. 처음에 묵을 쑬 때 물을 적게 잡아 엉긴 덩어리가 더러 있었는데 이렇게 무쳐놓으니 티도 안 나고 먹기에도 편한 것 같다. 집에서 장만해온 단호박 샐러드와 취나물, 무생채, 파김치와 진미채 반찬들도 그릇에 예쁘게 담아 상에 올렸다. 그러는 사이 밥솥에서 구수하게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법, 후식으로 준비한 딸기와 오렌지를 색감 좋게 올려놓고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이웃에 사시는 작은아버지와 작은 엄마를 오시라고 해서 다섯 명이 단출하게 아침을 먹었다.

언젠가 수험생인 작은딸만 집에 혼자 남겨두고 가족여행을 갔던 적이 있었다. 마침 돌아오는 날이 내 생일이었는데 작은딸은 그때 냉장고에 있던 고기를 넣어 미역국을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이라 어깨너머 본 기억만으로 끓인 것일 텐데 하필이면 그 고기가 돼지고기였다. 그날 우리 가족은 생전 처음 돼지고기 미역국을 먹었다. 조리대 위에는 불린 미역이 한 냄비 더 있었는데, 미역이 불어나서 건지면 또 불고 건지면 또 불어서 자꾸만 건져놓다 보니 저만큼이나 되었더란다. 하긴 처음 끓이는 건데 냉장고에 있던 고기가 돼지고기인 걸 어찌 알겠으며 미역이 그렇게나 불어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지만 그날의 미역국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작은딸도 엄마표 미역국을 끓인다.

식사가 끝나고 케이크의 촛불도 불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칭찬이 민망해서 나는 평생 빚진 미역국을 다 갚으려면 60년은 더 사셔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돼지고기 미역국에 대면 이제야 엄마의 미역국을 끓인 난 불효녀일 텐데. 어쨌건 미역국에는 영양소도 풍부하게 들어 있다. 철분과 요오드, 칼슘, 섬유질과 알긴산이 다량 함유되어 피를 맑게 해 주고 골다공증을 예방하며 장 활동을 돕고 피부미용에도 좋단다. 특히 요즘에는 포만감에 비하면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식으로도 사랑받는 건강식이다.

내가 아는 어떤 집은 가족 중 누군가 생일을 맞으면 모두 다 각자 집에서 따로 미역국을 끓여 먹는단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그런 식으로라도 서로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그 집안이 화목한 게 어쩌면 식구들 마음을 맑게 하고 소통하며 사랑하게 돕는 생일 미역국의 효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족 간에 숙변처럼 쌓이려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미역국을 먹을 때마다 쑥쑥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것일는지도. 생일 미역국엔 재료 말고 다른 무언가가 첨가돼서인 듯하다. 올해는 빚 갚는 마음으로 종종 엄마의 미역국을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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