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열풍에 미래는 없다
레트로 열풍에 미래는 없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4.19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함박눈처럼 흩날리며 절정으로 낙화(花)하는 4월의 나들이를 만끽하고 집으로 돌아온 휴일 저녁. 충분한 춘흥에 취해 모처럼 느긋하게 TV를 보고 있는 시간은 호사롭다. 그러나 그렇게 여유만만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갑자기 생긴 감정의 기복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TV를 볼 때마다 알지 못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하필이면 느긋하기 그지없던 그날, 그 막연한 불안함이 느낌이 아니라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박동이 빨라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다.

종영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빠져 있을 때만해도 풋풋한 젊음과 그 시절의 애틋한 사랑의 추억만으로도 훈훈해지는 가슴이 남아 있음이 뿌듯했다.

그러나 무미건조하게 TV를 켜놓은 시간동안 자꾸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이 많아지고 있음을 깨우치면서 불편한 마음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불안한 김정을 지울 수 없다.

“미래가 서서히 중단되고 있다(slow cancellation of the future)”는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의 극단적 표현은 최근 들어 열풍처럼 감지되고 있는 레트로(복고)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10년도 더 넘은 과거에 포켓몬 스티커 모으기 유행이 휩쓸면서 빵은 버리고 오로지 스티커만 챙기는 사회현상을 `병폐'로 여겼던 취재 경험이 생생한데, 이 시대에 다시 편의점 앞에 긴 줄을 만들고 있다. 19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인기 연예인이 2022년 TV광고와 각종 프로그램을 점령하고 있고, 리메이크 노래와 트로트의 광풍 또한 문화의 되돌이표가 되어 시대의 기호로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단기적으로는 문화가 말살될 지경으로 내몰린 코로나 팬데믹의 사회·물리적 거리두기로 인한 차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푸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차단되고, 따라서 다중이 모이는 온갖 문화예술행위가 중단되었던 엄중한 위기의 시대는 섣부르지만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때가 되었으니 기대를 품어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트로가, 리메이크와 리바이블, 리마스터가 난무하는 시대의 열풍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다는 문화의 척박성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만들고 있다.

원하지 않게 긴 동면의 시간을 보낸 이벤트업계와 갖가지 축제가 대중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예고하고 있고, 꽃들이 만발하고 신록이 짙어지는 눈부신 풍경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행렬이 온 산하를 누비고 있으니 그 해방감만으로도 문화적 자유의 봇물은 이미 터졌다.

다만 그렇게 깊게 침잠하고 꺼질 위기까지 내몰리며 문화의 팬데믹을 겪어 왔음에도 새로운 도전에 대한 탐구 또는 창조적 성찰은 눈에 띠지 않는다. 결국 암흑의 동면기 동안 얼마나 성숙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는가의 문제인데, 아직 그런 가상함은 찾아볼 수 없다.

보수로의 회귀에 대한 선택이 확인된 당대의 사회현상은 문화적 레트로 열풍과 서로 맞물려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변화와 성장, 그리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부재는 `미래'의 자리를 자꾸만 화려했던 과거로 채우려는 불편한 편리함이 있다. 인간성 회복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실종되고 상상력이 고갈되고 있는 시대의 불안은 결코 개인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사회로 전이됨으로써 구조적이며, 이러한 구조의 고착이 곧 시대의 문화성을 상징하게 된다.

좋은 시절을 회상하는 레트로 열풍이 문화를 정체시키는 해악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하게 기억되는 과거를 편리하게 되돌아봄으로써 일정 부분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향수의 소환은 불투명한 미래를 더 깊게 차단하는 역행이므로 진취적일 수 없다.

어렵게 살았지만 적어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던 좋은 시대로 회상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서서히 중단되는 미래'의 다른 이름이다.

일상은 그러므로 고통의 순간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미래의지로 회복되어야 한다. 더 많은 새로움으로 가득 채워지는 세상과 만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