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
그 꽃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04.1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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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다. 간지러움을 탄 봄이 메마른 덤불 속에서 슴벅 깨어난다. 샛바람이 칙칙한 세상을 순삭 해 버린 자리에 초록을 입히고 색색의 꽃을 피운다. 순간 후림불로 번져 만산홍화(滿山紅花)가 된다. 꽃소식이 전해지면 내 안에도 꽃불을 지핀다. 재티 위로 화화(花火) 타오른다. 지난해 데인 상흔이 문신처럼 박혀 있어 또 데일 걸 알면서도 다시 불을 붙인다. 온 천지가 꽃불로 화해지는 계절. 봄에 홀린다. 감탄하기에도 너무 짧은 찰나의 시간이다.

꽃 하면 윤여정 배우가 생각난다. 그녀의 초상화가 나에게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먹을 머금은 붓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붓꽃을 배경으로 한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본 작품이다. 청보라색의 꽃이 우아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첫 느낌이 고고하면서 정갈하여 붓꽃이 주는 청초한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려 잊히지 않는다.

미술계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문성식 화가의 꽃과 여자라는 작품 중 한점이다. 그는 다섯 명의 여배우를 연작으로 각기 다른 꽃을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데 하필 왜 붓꽃이었을까. 후에 명예의 오스카상을 받는 기쁨을 누렸기에 마치 미리 예견한 듯 보인다. 꽃말이 기쁜 소식이기에 혼자 해보는 생각이다.

작년 이맘 때 아카데미상을 수상 할 당시 현지 기자회견에서 한 말에 나는 반했다. “60세부터는 사치스럽게 살기로 했어요.” 이 한마디가 나를 사로잡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그게 사치라고 했다. 환갑이 넘어서부터 작품을 고르는 기준도 바뀌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성과나 결실에 대한 계산이 있었다면 사람만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냥 사람을 보고 사람이 좋으면, 작품을 가지고 온 프로듀서가 내가 믿는 사람이면 그걸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자신을 빛나게 해준 미나리도 대본을 읽지 않고 출연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내공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생각이다. 꾸밈없고 담백한 성격이 사이다처럼 시원하다. 나이 들어서 이런 매력을 가진다는 건 인생을 잘 살았다는 증거인 것 같다.

늙으면 누구나 다 똑같아진다는 말이 있다. 잔소리가 많아지고 고집이 세지는 법이다. 너 나 없이 대우받고 싶어 한다. 늙어감을 익어간다는 말로 위로하려 하지만 어디 익어가는 것이 쉬운가. 그녀에게선 설익어 떫은 맛이 아니라 농익어 깊은 맛이 느껴진다. 절제된 아름다움을 가진 숨은 매력을 발견한 나는 뒤늦게 그녀의 찐 팬이 되었다.

76세의 그녀가 다시 그림 속에서 붓꽃으로 피어난다. 지긋한 나이에도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우아하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꽃과 닮았다. 부드럽고 청초한 꽃잎이 나를 건드린다. 나도 꽃처럼 피어날 수 있을까. 지금부터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하고 살 수 있을까. 남은 생 동안 그런 사치를 누리며 살고 싶다.

나에게 사치는 무엇일까. 글을 잘 쓰는 전업 작가도 아닌 내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수필집을 세 권 내는 일이다. 이미 4년 전에 한 권을 냈지만 아쉽고 두 권은 미련이 남으니 세 권이면 좋겠다.

내일 모레면 환갑인 나이가 되고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별거 아닌 것들이 소중해진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그 꽃을 지금, 눈부신 햇발 너머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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