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는 언제부터 즐겼을까
꽃놀이는 언제부터 즐겼을까
  • 고은채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 연구원
  • 승인 2022.04.10 1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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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고은채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 연구원
고은채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교육활용팀 연구원

 

매년 이맘때쯤 SNS에는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은 바로 너나 할 것 없이 벚꽃이 개화하는 시기를 예측하여 알리는 카드 뉴스 또는 지도로 콘텐츠들에 주변인을 태그하며 함께 하자는 댓글들로 가득 찬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분홍, 노랑, 연두 다채로운 색상으로 가득 찬 야외로 꽃놀이를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봄을 맞이한다. 가볍게 도시락을 싸 들고나가기도 하지만 최근엔 고유 명사화된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며 떨어지는 꽃잎들로 바람을 느끼고 눈으로는 아름다운 자연의 색상들로 자연을 즐기며 꽃내음 가득한 향기로 콧속 가득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봄을 만끽하는 꽃놀이, 우리는 언제부터 즐기게 되었을까? 꽃놀이는 화전놀이 또는 화류라는 이름으로 삼월 삼짇날 경치 좋은 산과 교외로 나가 진달래꽃으로 전을 부치거나 가무를 즐기는 민속놀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미 신라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정원호가 달성과 현풍 지역을 포함한 경상도 각 군의 지지에 대해 기록한 『교남지(嶠南誌)』에 따르면, 경주에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이 신라의 궁인들이 봄놀이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 이 책에서는 신라의 옛 지명인 재매곡(財買谷)을 언급하며, 재매부인 설화에 얽힌 꽃놀이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김유신의 맏딸인 재매부인이 죽은 후 청연(靑淵)에 있는 골짜기에 묻었는데, 이후 이곳에는 매해 봄마다 수많은 꽃이 만발하고 송화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집안의 사람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이미 신라시대부터 꽃놀이 문화가 백성들 사이에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민속문화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세조실록』 중에도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다. 실록에 따르면 진달래꽃이 필 때 도성의 남녀, 혹은 귀부인들이 야외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태평시대를 만끽했다고 하며, 이를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했다고 한다.

흥의 민족이라는 별명답게 우리 민족은 먼 옛날부터 봄의 꽃놀이를 즐겨 왔다. 단순히 생각하면 계절이 바뀌고 보이는 풍경만 달라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봄이 오면 마음이 들뜨고 괜히 설레 한다. 천년전 신라인이던 현재를 살던 우리들이던 꽃을 맞이하는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매년 돌아오는 봄이지만 지나간 그때의 봄은 다시 반복되지 않고, 유한하므로 더 귀중하고 그 순간이 소중하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그 순간의 행복함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비록 지금은 코로나로 마음 놓고 왁자지껄하게 둘러앉아 꽃놀이를 즐기기는 어렵지만, 지친 마음을 달랠 겸 주변 가까이에 있는 봄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먼 곳이 아닌 가까운 산책길에서 달라진 색감과 바람을 느끼며, 추운 겨울이 가고 새로운 봄이 오며 시작되는 그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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