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설'부터 잠재워야
`풍수설'부터 잠재워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2.03.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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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광해군을 퇴출한 반정세력이 그에게 씌운 대표적 죄상이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어머니 격인 인목대비의 신분을 박탈해 유폐하고, 여덟살 짜리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역모로 엮어 유배지에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 못지않은 죄목으로 꼽힌 것이 무리한 토목공사 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임란때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 복원공사를 밀어붙였다. 두차례 왜란으로 고초를 겪은 백성들은 숨돌릴 새도 없이 산판과 채석장에 동원됐고 고혈을 짜내 공사비를 조달해야 했다.

신하들이 백성의 피폐한 삶을 전하며 속도조절을 건의했으나 소귀에 경읽기 였다. 선조를 대신해 전시조정을 이끌며 전쟁을 주도했던 세자 시절의 명민함은 그에게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보다 황당한 일은 1년 후 창덕궁이 준공된 후 벌어졌다.

백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사를 재촉했던 광해군은 정작 창덕궁이 준공되자 이사를 거부했다. 사소한 핑계를 대며 빨리 임시행궁(경운궁)에서 본궁으로 옮겨 나라를 안정시키라는 신하들의 진언을 외면했다.

광해군은 풍수가인 `이의신'이라는 인물을 가까이 했다. 실록인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는 광해군이 고집을 부린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창덕궁은 선대 왕들이 두번이나 큰일을 겪은 곳이라 거처로 삼기 꺼림칙하다”고 이의신에게 말한다. 삼촌에게 왕좌를 뺏기고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은 단종과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을 일컬은 말이었다.

왕의 창덕궁 이주는 5년이나 지난 후 이뤄졌다. 조정의 거듭된 주청을 거부하던 광해군은 임시행궁에 변고가 있을 것이라는 점술가의 말을 듣고서야 이주를 결단했다. 그로부터 8년 후 광해군은 자신이 그토록 기피했던 창덕궁에서 반정군을 맞았다. 얼핏 보면 자신의 미래를 점친 선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대는 물론 후대 어느 시대에도 그의 불행한 말로를 창덕궁 풍수 탓으로 돌린 사람은 없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옮기자마자 새로운 토목공사를 추진했다. 그 때마다 점술가나 풍수가가 등장한다. 인왕산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산자락에 새 궁궐을 지으라고 했고, 조카가 사는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땅을 몰수해 궁궐 신축에 들어갔다. 세수의 4분의 1이 건축공사에 들어갔다. 백성에게 왕은 재앙 그 자체가 됐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 자신을 지지했던 이이첨·정인홍 같은 대북파로 조정을 채워갔다. 내편의 정파로만 주변을 꾸리고는 풍수가들과 어울려 궁궐공사에 집착했다. 쿠데타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을 때 식솔과 내관들 빼고는 왕의 곁을 지킨이가 없었다.

우매한 군주의 허망한 최후에 풍수 따위가 핑계로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홀로 자초한 필연적 결말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두고 풍수설이 나돈다. 청와대 존치를 바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는 단 하루도, 단 한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단호한 태도와 후보 시절 돌출됐던 역술인 논란 등이 이같은 구설의 발단이 된 듯하다. 물론 근거없는 낭설일 터이다. 그리고 낭설이어야 한다. 반대하는 국민들조차 당선인의 소신을 더 가까이서 민심을 챙기겠다는 순수한 충정으로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오늘 저녁 윤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다.

당선인 측은 “국민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하다고 판단했다”며 회동에 임한 입장을 밝혔다. 집무실 이전을 둘러싸고 나도는 해괴한 잡음을 해소하는 것도 국민의 걱정을 더는 일 중 하나다. 국민이 공감하지 않는 소신과 그에 따른 소모적 분란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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