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시작되었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2.03.2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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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전쟁과 질병 소식에도 꽃은 핀다. 꽃소식이 남녘에서 들려오고도 한참 지나서야 우리 마당에는 봄기운이 돈다.

땅에 납작 엎드린 크로커스 꽃이 수줍게 올라온다. 겨울을 견디고 올라오는 작은 꽃이 대견하다. 날이 풀리면서 마당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흙과 한 몸으로 지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꼭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처럼 자꾸만 몸과 마음이 밖으로 향한다.

땅에서 꼬물꼬물 올라오는 고것들이 보고 싶어 방에 앉아있을 수가 없다.

`꽃은 어찌하여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내가 말해놓고도 사랑이라는 말이 참 생소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언제 느껴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얼마 전 글쓰기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팔순을 넘긴 어른이 오셨다. 자기소개와 인사를 하는데 “저는 지금 팔십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그 사람과는 동갑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무척 행복합니다. 우리는 매일 전화통화를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데이트도 합니다. 내가 쓰는 글도 함께 읽으며 조언도 해줍니다. 사는 날까지 서로 의지하며 좋은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에 봄처럼 생기가 돈다.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해맑고 수줍다.

우리는 손뼉을 치며 웃었지만, 가슴이 뭉클했다. 어르신은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하신다.

사랑, 그 아름다운 덫, 어르신은 지금 그 덫에 걸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어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노인의 계절을 살아가지만 다시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모든 예술의 주제는 사랑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 미묘한 감정을 묘사하는 표현의 방법 또한 수십 수천으로도 부족하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때를 잘 맞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오지에서 차가 고장이 나고 그때마다 멋진 사람이 나타나 해결해주는지.

그런 만남이 누구에게 나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

문학회행사로 바쁜 날이었다. 전시회준비로 인쇄소에서 행사용 책자를 찾아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데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혔단다.

책을 떨어트리며 책을 묶었던 끈이 풀어지면서 길바닥에 책이 확 흩어졌는데 부딪힌 사람도 그냥 가버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하지 책 한 권 주워 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영화에서 보면 멋진 사람이 도와주면서 눈빛이 마주치는 일도 생기던데 자기한테는 책자 하나 주워주는 놈도 없더란다.

식식거리던 문우님 생각이 난다.

그 난감한 상황에도 혹시나 멋진 사람이 나타날까 그런 기대를 했단다.

사랑은 접촉사고처럼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곳에서 생기는 것이다.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올 것을 기대해 본다. 누군가는 이 나이에 주책 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봄과 여름만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사랑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글쓰기 교실의 팔순의 소년에게도 찾아오지 않았는가.

사랑은 시작되었다. 벌써 논에는 개구리가 짝을 찾느라 바쁜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크로커스 그 작은 꽃에도 벌이 날아든다.

코로나19로 대문 밖 출입도 불편하다. 올봄에도 마당에서 장화를 신고 왈츠를 추어야 할 것 같다. 봄을 한껏 즐겨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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