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근육이 필요하다
시적 근육이 필요하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2.03.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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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왜 봄이 왔을까요? 시적(詩的)으로 표현해 볼까요?”

“꽃을 피우려고 봄이 왔습니다.”

김남권 시인의 대표 시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로 첫 만남의 인사를 트니 서먹함이 가시는지 표정들이 밝다. 이번 독서 토론 특강이 다소 어려운 주제라 긴장을 풀기 위한 시로 마중한 오프닝 멘트였다. 학교에서 독서 토론 특강으로 어떤 책이 좋으냐고 물었을 때 하이데거 사상이 기본 베이스인 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추천했고 학교에선 방학 중인 학생들에게 책과 점심으로 샌드위치 도시락을 제공했다. 책을 좋아하는 자발적 참여자들이라 토의 수준이 철학 전공자 수준을 넘는다.

“삶은 왜 짐이 되었을까요?”

“삶을 무겁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4년생이 내린 명쾌한 대답이다. 저자는 전대미문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이 시대를 가장 궁핍한 시대라고 규정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기술적으로 처리되고 자원이나 수단으로 간주하는 세계는 궁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각 존재자는 그 안의 성스러움, 즉 신성을 지니는데 우리가 수단으로만 일괄적으로 가치를 측정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인식과 매 순간 존재자에게서 경이와 공감할 수 있는 시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과는 다른 의미이다. 시적인 태도야말로 사물들 스스로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 즉 존재자 스스로 존재를 발현하도록 간섭하지 않고 가치화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결론은 어떤 보편의 논리로 재단하지 않고 세간의 욕망을 내려놓으면 사물의 존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전언이다. 삶의 짐은 탐욕과 비례한다. 삶이 짐이 되는 이유는 초두에 학생이 내린 답처럼 삶을 무겁게 들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욕망한 만큼 무거울 수밖에 없다.

질문 시간에 한 여학생이 하이데거 사상을 헤르만 헤세의 작품과 연결해서 이해해도 무방한지 묻는다. 헤르만 헤세, 니체, 하이데거 모두 내면으로 길 트기와 자립이라는 공통점과 실존 사상이 바탕이니 가능하다고 하니까 이 시대의 전체 화두는 사물이든 인간이든 존재 찾기인 것 같다고 정리한다.

영국 시인 콜리지는 하나의 꽃이든 한 알의 모래알이든 그것이 존재하는 신비를 느낀다는데 `시인인 선생님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야에서 일제히 초록 잎이 고개를 내밀 때 경이를 느끼고 피보나치수열 구조를 통해 만물은 수로 되어있다는 피타고라스의 원리를 발견할 때 신비를 느낀다고 했더니 산림과 학생이 공감하는 박수를 보낸다.

몇몇 학생에게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였느냐 물으니 `우물 밖 세계를 본 기분'이라고 한다. 대부분 전공 서적 외에 인문학 서적은 읽을 기회가 없는데 독서토론 특강을 통해 좋은 책도 받고 선후배 학우들과 열린 공간에서 현 시대의 구조와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인문학 책을 읽고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젊은 학우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파릇한 미래를 본다. 지금 이 모습이 대학의 일반 강의실 풍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삼삼오오 교정 벤치에 앉아 마르크스를 논하고 헤겔을 논하던 그 사유의 근육들은 퇴화된 것일까? 저마다 손에 문고판 한권 씩 들고 교정을 어슬렁거리며 젠체하던 그 옛날 아날로그 낭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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