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장사
남는 장사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2.03.0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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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오일장에 가서 흙이 묻은 싱싱한 더덕을 사 왔다. 껍질을 벗겨 도마에 올려 잘근잘근 찧는데 향이 짙다. 고추장 양념한 더덕을 팬에 구워 식탁에 올렸다. 잃었던 남편의 입맛이 돌아온 듯했다.

병원 출입이 잦은 남편은 자주 밥투정을 한다. 밥맛이 없다. 입에 맞는 찬이 없다면서 내 속을 긁는다. 구미가 당길만한 음식 재료를 찾느라 냉장고 안을 뒤적인다. 3년 공들이고 사십 년 넘게 우려먹고도 모자라 어찌 요구 사항이 그리 많으냐며 내가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고 투덜거린다.

산골 작은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던 마당에는 고목이 된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아침이면 나무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지저귐에 눈을 떴다. 포근했던 할머니 품에서 자란 나는 사춘기 무렵 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결을 내주지 않는 새어머니는 다가설 수 없는 큰 바위 같았다. 어느 날 심하게 배가 아파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 급성 맹장염이라 했다. 병원장은 아버지 지인이었다. 혼자 찾아간 병원에서 서둘러 수술을 했다. 부분마취를 한다며 구부린 척추에 주사를 놓았는데 마취가 충분치 않아 무척 고통스러웠다. 회복 기간 일주일 동안 아무도 병실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이복형제들도…. 수술의 아픔보다 외로움의 통증이 더 컸다.

이듬해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바쁜 하루가 붉은 노을로 저물고 어둠이 내리면, 우리는 수정교 옆 둑길을 자주 걸었다. 달빛을 받으며 나눈 많은 이야기는 함께 간직할 추억으로 쌓였다. 그도 모자라 못다 한 마음은 러브 레터에 담아 사흘이 멀다고 날아왔다. 그것은 마치 상처 난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와도 같았다. 그렇게 3년이 흐르면서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했다.

열애는 환상이고 결혼은 현실이었다. 목욕탕을 운영하던 친정에는 냉온수가 넘쳐났지만, 농사를 짓는 시댁에는 방앗간에서 도정한 왕겨를 연료로 쓰고 있었다. 길고 동그란 연통을 아궁이 속에 밀어 넣고 풍구를 돌려 왕겨 불로 밥을 짓고, 가마솥에 물을 데워 허드렛물로 썼다. 겨울에 몰려 있는 종가의 봉제사 받들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가족 간의 훈훈한 정과 시부모님의 사랑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문제는 남편과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우리는 설 절인 배추처럼 자신의 뜻을 우기며 굽히지 않았다. 남편이 시작한 건축자재 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상의 없이 욕심을 부리는 남편과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7·80년대 건축 붐은 일었지만, 시멘트 파동과 맞물렸고,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급기야 키우던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제대로 절여진 배추처럼 서로를 포옹하게 되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지낸 지 어느덧 45년, 아옹다옹하던 세월을 건너 측은지심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우리 앞에 성큼 와있다. 오늘도 남편의 밥투정이 조금은 지나치다 싶지만 항암주사 탓이기에 그의 입맛을 돋우려 장바구니를 든다.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3년이나 내 곁을 지켜준 사람, 그 3년이 나를 살게 해 준 것이 아니었을까. 밑지는 장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남는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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