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인연
지금의 인연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2.03.0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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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단상 위에 서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준비해 간 인사말을 천천히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제야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다.

욕심이 생겼다. 글이 좋아 글을 쓰다가 모임에 소속되어 발로 뛰면서 행사를 돕고 진행을 하면서 활동한 지 삼십여 년이 넘었다. 좋아서 한 일에 어떤 보상이나 지위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 남편이 `회장은 한 번 해야 하지 않아?'라며 던진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명예욕이 전혀 없던 사람을 주변에서 선동해서 선거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경우도 봐 온 터라 사양했다. 첫째는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를 보필하는 일은 잘할 수 있었지만, 리더의 자리에서 이끄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정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내적 갈등은 있었지만 단체의 장을 맡기로 했다. 사회적인 지위의 변화를 인정받는 형식적인 통과의례를 치르기로 하면서 시국이 어수선한지라 당일까지 조마조마했다. 회원만 초대해서 하는 행사였지만 참석 인원을 몇 번씩 확인하며 부탁했다. 행사 시간이 다가와도 사람들이 안 오자 옆에서 챙겨주던 언니가 더 조급해했다.

흔히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인연'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인연이란 불가에서 유래한 말로 인은 원인을 말하며, 연은 원인에 따라가는 것이다. 즉 인이 내가 뿌린 씨앗이라면 연은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과 연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날 참석해 주신 분들을 보면서 새삼 `인연'의 깊이에 생각이 닿았다.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중에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는데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체감한 순간이다.

외진 곳인데도 원로 문우님들이 많이 참석해 주셨다. 시로 문단에 발을 디디고 수필을 쓰기까지 큰 힘이 되어 주신 B 선생님, 특히 생각지도 못했던 Y 선생님의 참석은 놀라웠다. 그날 저녁은 바람도 불고 상당히 추웠는데 의외였다. 장소를 잘못 알고 다른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가셨다가 직원이 모셔와서 행사 끝 무렵에 도착하셨다. 음성 문학 소모임을 함께 했던 첫 문우의 정을 잊지 않고 간직하신 그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다. 평소에 잘 챙겨 드리지도 못하고 예의를 갖춘 인사만 드렸는데 부끄러웠다.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것이 잘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세심히 살피지 못하고 사람에게 소홀한 부덕의 소치다.

톨스토이 단편선 <세 가지 질문>은 삶의 지혜를 찾기 위해 현자를 찾아간 왕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이야기다. 왕이 한 세 가지 질문은 누구나 궁금해하는 보편적인 물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이 질문이 큰 위로를 준다. 과거에 주변인을 무심히 대하고 세심하게 귀 기울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흔적을 되짚어 봤다.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들이 또렷하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통해 고민을 덜어낸다. 인연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과거의 시간을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함께하는 사람과의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함이다.

큰일을 치르면서 사람의 인연을 짚어 본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 후 더욱 간절해진 것처럼, 내가 필요할 때 함께 하는 이들을 보면서 인연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내가 뿌린 씨앗임이 자명하게 드러났다. 바이러스의 두려움도 떨치고 추운 날 찾아와 준 선한 얼굴도 기억할 것이며, 지금 이 순간 찾아오는 인연의 시간도 잘 쌓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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