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과 성불
견성과 성불
  •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22.02.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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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수행자들이 견성을 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견성(見性)은 볼 견자에 성품 성자로 성품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불가에는 스님들이 정진을 하는 기간인 하안거, 동안거가 있습니다. 대략 여름에는 두 달, 겨울에는 세 달을 오로지 수행 정진만 하는 것입니다. 동안거 하안거가 끝날 때 모든 스님들이 모여서 큰 스님을 모시고 선문답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은 견성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쉽게 견성인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불교에서는 견성의 의미를 성불(成佛)까지로 보기 때문입니다.

견성하면 성불이다, 완전해져야 한다 생각하는 겁니다. 견성 즉 성불. 성품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주의입니다. 돈오돈수라고 하죠. 한 번 깨달으면 모든 수행이 필요 없다, 그냥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수행자들에게는 깨달음, 견성이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원불교에서는 견성의 의미를 성불로 보지 않습니다. 견성은 견성이고 성불은 성불입니다. 견성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죠. 그런데 깨달았다고 부처가 아닙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유지하면서 깨달은 내용대로 실천할 때 부처라고 합니다.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고, 또 실천하고, 계속 실천해서 실천하려 하지 않아도 실천하게 되는 경지까지 가야 부처입니다. 깨달았더라도 수행을 하고 또 수행을 해서 수행하지 않아도 수행하게 되는 경지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이죠. 나쁘게 살던 사람이 교도소에 가서 고생을 하고 이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게 해결되는가요? 아니죠. 착하게 살아야죠. 하루만 착하게 살면 됩니까? 다음날 또 나쁘게 살면 됩니까? 죽을 때까지 착하게 사는 걸 실천해야 합니다. 교도소에서 고생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늘 마음속에 새기면서 착하게 사는 걸 실천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걸 챙기지 않아도 착하게 살아지는 때까지 실천을 하고 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불교에서도 견성을 하는 즉시 성불을 하는 것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전생을 닦은 경우에는 그렇게 인정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소태산 대종사님 같은 경우이지요.

이제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목적은 부처가 되기 위함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목적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은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많은 경전을 통하여 밝혀놓았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밝혀 놓은 삶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입니다.

원불교의 새부처님 소태산 대종사님은 정전(正典)을 통하여 부처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기 위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처다, 부처들은 이렇게 산다 하고 직접 밝혀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알려 주신 부처로 살아가는 방법을 그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그렇게 실천하고 또 실천하면 어느새 우리는 부처가 되어 있고, 어느새 우리는 이미 깨닫고 이미 견성을 하였을 것입니다.

로또 당첨 번호를 알고 있다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권 판매소에 가서 그 번호를 적고 구매를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깨달음은 허상일 뿐입니다. 그 시간에 경전의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견성과 성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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