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벙
둠벙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2.02.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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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여섯 마지기 논이 붙어 있는 곳에 둠벙이 있었다. 가뭄이 들 때마다 둠벙에 고인 물이 요긴하게 쓰였다. 그 물은 마르지 않았다. 가문 논에 물을 대느라 퍼 써도 다음 날이면 꼭 그만큼의 새 물이 다시 고여 있었다. 논일을 마친 아버지가 손발을 씻고 흙 묻은 삽이나 낫을 씻던 곳, 물속에는 미꾸리와 민물새우가 살고 우렁이도 있었다. 곤충의 유충도 함께 살아 주변으로 파충류나 조류들도 모여들었다. 농수로가 없던 시절, 습지 생태계인 둠벙은 농사철에는 요긴하게 물을 쓸 수 있는 곳이었다가 겨울이 되면 아버지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가끔, 젊은 아버지가 둠벙의 얼음을 깨고 미꾸리와 새뱅이를 잡아 왔다. 그때마다 하얀 광목 앞치마를 두른 엄마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저녁연기가 땅으로 깔리고 어둑해져야 안방 문이 열리면서 찬바람과 함께 들어온 밥상 위에서 피어나던 알싸한 매운탕 냄새를 어찌 잊으랴. 매운 양념으로 숯불에서 자작하게 졸인 미꾸리 냄비는 아버지의 몫이고 큰 냄비의 얼큰한 새뱅이 찌개는 대가족이 둘러앉아 먹어도 풍족했던 것은 충실하게 제 역할을 했던 둠벙 덕이었다.

휘발된 추억을 소환한 것은 가까이 지내는 문우였다. 누군가를 내게 소개하면서 둠벙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왜 그리 반가웠을까. 말라가는 벼포기를 적셔주고, 겨울이면 우리 집 식구들에게 가끔 호사스러운 밥상을 차리게 했던 둠벙이 아닌가. 유년의 풍성한 저녁 밥상이 떠오르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소개만 받았을 뿐인데도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마음이 따듯해졌다.

식사 자리에서 마주한 둠벙 같은 사람은 말수가 적었다. 서로의 관계를 따지자면 그는 갑이고 눈치 보며 부탁을 하는 나는 을이다. 단체의 장을 맡고 늘 행사비 부족으로 전전긍긍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싸움닭처럼 덤비는데도 거칠지 않고 잔잔하다. 두서없는 내 말을 경청하고 메모하며 조용한 미소로 나의 조급함을 달랜다. 내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섭섭하지 않을 것 같으니 무슨 조홧속인가.

나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타인이 보는 나이며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보는 나다. 두 시선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하다고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객관적인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정확하지 않을까. 문우는 그을 둠벙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 타인들이 바라보는 나는 무엇과 비교될까.

바다처럼 넓거나 깊지 않고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둠벙의 일정한 삶을 그에게서 본다. 넘치거나 마르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무엇보다 모든 걸 포용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겸손함이 매력이다. 진실한 한 사람의 영혼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축복 아니겠는가.

유년의 로망이 담겨 있는 언어에는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한다. 고향이 박제되어 있는 나에게 여전히 눈물겹게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는 둠벙, 그리고 둠벙 같은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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