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는 일,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못하는 일,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2.01.2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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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난 신화, 전설, 민담 등과 같은 설화가 좋다. 우리네 삶과 밀접한 이야기라 좋고, 재미가 있어 좋고, 상황에 맞는 재치가 있어 좋다. 또한 숨겨 놓은 교훈 찾는 재미가 쏠쏠해서 좋고, 지역의 특성이 담긴 서사의 차이를 찾는 재미가 있어 좋다. 그중에 으뜸은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당대의 가치관 알아가는 재미일 것이다.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보니 서사 속에 집단의 세계관, 신앙, 의식, 사상 등이 담겨 있다. 지금 그 설화의 기능이 살아 있을까? 옛사람들의 이야기는 글자화 되어 옛이야기로 보존되고 지금 시대 이야기는 창작 동화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형식의 글이 또 있다. 옛이야기에 지금의 가치관을 접목시킨 패러디 그림책들이다. 원전과 다른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거나, 등장인물 간의 역할을 바꾸거나, 지금의 관점을 담은 후속 이야기로 당대의 가치관을 말한다.

<신발귀신 양괭이의 설날/김미혜/비룡소>도 패러디 형식의 그림책이다. 어렸을 적 설날 밤이면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았던 기억이 있다. 야광귀가 이 신발, 저 신발 신어 보다가 맞는 신발이 있으면 신고 간단다. 잃어버린 신발 주인은 그 해에 불운이 온단다. 하여 우리는 새해 첫날 저녁이면 의식을 치르듯 신발을 방으로 들여놓곤 했는데 그 야광귀가 이 양괭이인 것이다.

옛이야기는 우리에게 여지를 준다. 해악을 끼치는 도깨비나 동물들을 우둔한 캐릭터로 만들어 대비할 여지를 준다. 양괭이는 구멍이 많은 것을 보면 세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수 세는 것을 좋아하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은 허점이 있다. 그러니 구멍을 세고 또 세고 하다 보면 날이 밝아 신발은 신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 어찌 이런 귀여운 귀신이 있을까? 이를 알고 있으니 방비책은 당연히 있다. 바로 대문에 구멍이 많은 체를 걸어 놓는 것이다. 밤새 체의 구멍이나 세다 가라는 얘기다. 새해 설빔으로나 받았을 신발! 그러니 어찌 귀하지 않았을까. 그 귀한 물건,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나의 운이 타인에게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격언이지 싶다.

김미혜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사고의 폭을 한 발 더 넓히는 이야기를 해 준다. 양괭이도 새해 다짐을 한다. `못 하는 일 하지 않기!'. 수 세다 신발은 신어 보지도 못하고 허탕 치는 일은 없을 거란 거다. 그리고 신발 주인은 체만 걸어 두는 일로 안심할 수 있을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소원이는 `오늘 낮에 똥 밟았음'이라고 쓴 편지를 신발에 넣는다. 그러니 내 신발 신지 말라는 경고장이다.

가치관의 변화다. 그 시절 아니,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안 되면 될 때까지!', `시작했으면 끝을 볼 때까지!'란 기치 아래 열심히 할 것을 권했다. 물론 그리해야 하는 것도 있다. 사람의 일이 어찌 양비론으로 해결되던가! 적어도 앙괭이처럼 기회도 잡지 못하고 좌절을 맛보는 일을 덜 겪으라고, 소원이처럼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보라고 패러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권한다. 이게 패러디의 맛이다!

단, 패러디 그림책은 원전을 먼저 읽어야 그 맛을 안다. 작가의 주관이 일관되고 명확하게 드러나는지 따져봐야 한다. 원전과 다른 가치관으로 삶을 탐구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패러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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