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 이제 허물어도 되지 않을까
빨간 벽, 이제 허물어도 되지 않을까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 승인 2022.01.20 1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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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이야기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장

 

이미 가지고 있는데 다시 사게 되는 책이 있다. 책을 목차대로 정리하며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또 그런 일이 생긴다. 그림책 `빨간 벽(브리타 데켄트럽 글·그림. 김서정 옮김. 봄봄 출판사)'은 그렇게 두 번 나에게 찾아왔다. 읽을 때마다 그 깊이를 더해주는 그림책이라 또 사게 되는 것 같다.

벽이나 담을 소재로 한 시와 책이 여럿 있다. 글로리아·J·에반즈의 `담'과 최문주 시인의 `벽과의 동침이'은 그 에 속한다.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 주는 색깔과 느낌이 있는데 `벽'에서 받는 이미지는 견고하고 답답하고 무겁고 차갑다.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이미지도 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벽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한 줄 한 줄 쌓아 올린다는 전제가 있어 그 견고함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그림책 `빨간 벽'은 동물들이 사는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빨간 벽에 대한 이야기다. 호기심 많은 생쥐는 빨간 벽 넘어 무엇이 있을지 늘 궁금하다. 그래서 겁 많은 고양이에게, 늙은 곰에게, 행복한 여우에게, 으르렁 소리를 잃어버린 사자에게 빨간 벽 넘어 세상에 대해 질문한다. “난 정말 궁금해. 저 벽 너머에 뭐가 있을까?”

그들은 어떤 대답을 했을까. 벽은 원래부터 있었고 보호막이 되어주니 궁금해하지 말라고 한다. 생쥐에게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현재를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대답을 듣다 보니 그들의 마음 상처가 보인다. 위험한 것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자기신념에 두려움 뒤에 숨어 있는 고양이, 이전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에게 고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곰, 약해진 자신을 수용할 수 없어 우울하고 무기력한 사자, 현재의 삶이 아주 만족하다며 합리화하는 여우가 그들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삶을 마주하며 경험했던 많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생쥐는 그들과는 다른 삶의 자세를 선택한다. 사실 생쥐는 빨간 벽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에 리스크가 크다. 작고 강하지 않은 몸을 가졌고,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볼 수 없으며 우직한 성실함을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생쥐에게 있는 선천적인 것들은 생쥐를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생쥐는 자신의 마음에 집중한다.

어디서 왔을까. 빨간 벽 너머에서 온 파랑새 한 마리에게 생쥐는 빨간 벽 너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파랑새를 타고 벽 너머에서 만난 아름다운 세상. 생쥐는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어 뒤돌아선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원래부터, 그곳에 그동안 늘 있었던 빨간 벽이 보이지 않는다.

빨간 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그 벽은 왜 사라진 걸까. 이 벽은 마음이 만들어낸 벽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났던 상처의 경험이 만들어낸 보호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위해 만들어진 벽이 이제는 나의 시선을 가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 더 많은 경험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벽으로 변질 된다.

나는 상처가 아물면, 아픈 경험의 기억이 작아지면, 그 벽도 낮아지고 허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만들어진 벽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벽이 오히려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마저 접게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간 벽. 아무도 그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그 벽은 그대로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 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니, 마음의 눈으로 잘 살펴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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