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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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2.01.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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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낮게 떠 있는 회색 구름, 눈이 내릴 것 같은 흐릿한 날이다. 분주한 아침, 마음이 바쁘다. 일주일 동안 고대하던 곳을 방문하려 준비하는 내내 설레는 마음은 몸보다 더 빨리 달려가고 있다. 이토록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은 하얀 눈을 기다리는 그리움 때문이 아니다. 올겨울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 공예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다.

먼발치 은은한 조명 빛이 새어 나오는 한적한 곳, 특별한 공기가 느껴지는 목공예 공방이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하게 감싸는 나무 향, 둔탁한 원목을 켜는 소리가 경쾌한 음률을 타고 흥분된 말소리도 음정을 타는 것처럼 리듬을 탄다. 두근두근 공예 첫 작품으로 볼펜 만들기에 도전, 거칠고 투박한 원목을 디자인했다. 볼펜 크기로 원목을 절단하여 나무토막으로 가공했다. 공구에 익숙하지 않은 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괜스레 몸이 떨리고 가슴은 방망이질이다. 침묵 속에 침묵 오로지 기계음만이 정적을 깬다. 긴 어둠의 터널을 시원스레 빠져나가는 느낌처럼 나무토막 중앙에 볼펜 심을 넣을 곳을 드릴로 구멍을 냈다. 생각하는 데로 이뤄진다고 금 새 작품 만들기에 두려움보다는 자신감과 열정이 충만해졌다.

목공 선반(나무 깎는 기계)에 구멍을 낸 나무토막을 끼워 조각 끌로 볼펜 모양으로 성형을 시작했다. 조각 끌에서 서서히 다듬어지는 나무토막, 희미한 안갯속에 드러나는 풍경처럼 볼펜 모양으로 속살을 드러낸다. 옷을 만들 때 가봉하듯 가공된 볼펜을 부드러운 사포로 문질러 매끄럽게 다듬었다. 실크를 만지는 듯 촉감이 매혹적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완성된 작품을 빨리 보고픈 흥분된 마음, 과정보다 결과에 매달려 조급증에 안달하는 속내를 애써 감췄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목재로 집을 짓는 목수(木手) 또는 목장(木匠)들의 기능이 최고였다. 우수한 기술이 일찍이 발달한 우리나라, 일상생활여건에 따라 갖가지 민구(民具)용품에 나무로 제작하는 것이 많은 나라다. 때문에 목재를 다루는 탁월한 솜씨가 발달한 민족이다 보니 나도 그런 걸까. 잠재된 끼가 있는 것인지 뚝딱 볼펜을 완성했다. 은근한 나무 향, 손끝으로 전해지는 나뭇결을 따라 목재 오일을 발라 건조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목재를 켜고 재단을 하여 나뭇결을 살리려고 브러시로 다듬어 생명을 불어넣는 목공예. 난생처음으로 볼펜에 이어 조명등, 도마 등 목공예를 제작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만능시대, 굳이 몸을 쓰지 않아도 음성인식으로 음악, 영화, 잠금 해제는 물론 쇼핑까지 다해주는 최첨단 시대에 목공예는 아주 특별했다. 톱밥과 분진이 날리는 작업실, 우울할 때에는 달달한 초콜릿이 최고인 것처럼 요즘처럼 무료한 시간에 목공예는 정서적인 취미의 으뜸이었다. 흔하디흔해 발밑에서 밟히고 나뒹굴던 나무토막도 새로워 보이는 이 겨울, 나무를 다듬고 창작하는 과정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감성이었다. 못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차원이 달랐다. 거칠고 모난 하찮은 모래일지라도 거센 파도와 부딪치고 노래하면서 부드럽고 매끈한 모래가 된다. 이처럼 둔탁한 원목이 고목에 꽃이 피는 것처럼 볼펜과 도마 그리고 조명등 공예작품으로 재탄생하여 품에 안겼으니 부활이었다.

어느 듯 청춘은 멀리 달아나 가고 갈아탄 중년의 세월 열차는 지칠 줄 모르고 달린다. 그럼에도 중년이 괜찮아 보이는 건 농익은 삶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의연한 시간이 많기 때문일 게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서 석양이 창문에 걸렸다.

그 밤, 조명등마저 꾸벅거리고 졸고 있는데 난 눈꺼풀이 무거운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다. 아름다운 공예와 동행하는 내 모습에 취해 자다 깨다 선잠을 자면서 다시 몽환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변했다. 중년 열차에 탑승한 요즘 내 가슴엔 봄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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