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내가 나에게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2.01.0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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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동백꽃에 홀렸다. 저번 본 꽃에 끌려 또 보러 갔다. 나무에 곱던 꽃등은 거지반 꺼지고 땅바닥을 수놓은 꽃잎만 붉다. 누군가의 울음을 토해 낸 듯 싸락눈처럼 흩뿌려져 선홍의 꽃물을 풀어내고 있다. 꽃비로 내리는 벚꽃이 왈츠를 보는 거라면 동백은 꽃눈으로 내리는 미뉴에트를 보는 것 같다. 쪼그려 앉아 꽃잎을 손안에 담는다.

피우기 좋은 계절을 마다하고 하필이면 겨울을 택한 꽃. 벌도 나비도 없는 계절에 향기가 아닌 강한 색으로 새를 불러들이는 꽃. 차가운 눈 속에 피 흘려도 사랑은 찬란한 것이라고 외치는 하얀 눈 사이로 불긋불긋 더 눈부신 꽃. 도도해 보인다.

나무는 겨울이면 제 잎을 다 떨구어내고 혹한을 이겨낸다. 유독 푸른 잎에 꽃을 피우는 일은 독보적이다. 나무에서는 당연히 예뻤고 땅에 뒹굴어도 여전히 곱다. 지는 모습까지 매혹적이다. 마지막 앞에 이리도 당당할 수가 있다니. 왠지 눈물이 난다. 마치 초라한 모습을 감추려고 안간힘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해 보인다. 이제 그만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아름다움은 순간이고 미련이 남는 법이지만 이미 충분히 예뻤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도 고와 많은 이들의 시선도 끌었다. 예쁜 만큼 시샘도 많았을 게다. 시린 눈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꼿꼿했다. 오히려 눈은 꽃을 더 화려하고 고혹적이게 만든다. 이렇게 꽃을 피운 모습을 한 번도 다시 찾아와 주지 않는 동박새를 미워해도 소용없을 터이다. 저 때문에 꽃이 된 줄도 모르고 있을 테니. 자신의 꽃가루받이 기술을 전혀 모르는 눈치니까 말이다. 마치 벌과 나비만의 특권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원망이 커질수록 더 붉어지는 건 깊어가는 그리움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유인 듯하다.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합니다” 꽃말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전설도 애섧다. 한 여인의 애달픈 사랑이 숨어 있다.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병을 얻어 죽은 그녀의 무덤에 그가 떠난 바닷가를 향해 선홍빛의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이라도 또다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망울을 주저하지 마. 톡톡 터트려 세상에 존재를 알리는 거야. 이즈음 너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없으니 그래도 괜찮아. 남들이 꽃피는 동안 긴 시간을 참고 기다려 피워냈으니 그럴 자격이 있어. 누가 뭐래도 치열하게 최선을 다한 생이니까'

꽃을 향한 혼잣말이 마음에 박히고 가슴에 꽂힌다. 결국 낙화(花)가 멀지 않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혼자서 내가 나를 토닥이고 있는 것이다. 꽃을 보면서 나를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자책도 했다. 하루하루가 절망일 때도 있었다. 그저 오늘을 사는 게 아니라 억지로 살아지는 날들이었다. 너무 힘들 때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었다.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고통을 알기에 여린 꽃잎 위에 쌓인 눈에 마음이 자꾸 쓰인다. 화상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욱신거릴 통증이 내게로 건너온다.

남들이 다 꽃을 피울 때 피지 못한 속 상함을 이겨내야 한 봄. 한창 절정을 뽐낼 때 초라함을 견뎠던 여름. 가을이 깊어가도록 희망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던 시간을 보내고 난 내가 꽃 위로 오버랩 된다. 어찌 된 일일까. 이제 무심히 스쳐가던 사람들이 나를 돌아본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말로 내 등을 두드려준다. 악을 쓰고 버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동백이 화려했던 한 생을 사르고 지고 있다. 꽃 한 송이가 내 안에 툭 떨어진다. 꽃가루가 날린다. 내가 아프다. 남아있는 상처에 화화(花火) 꽃이 피어난다. 이제 내가 꽃 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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