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세요
연필로 쓰세요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2.01.0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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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노랫말을 듣다 보면 쓴맛이 났었다. 사랑도 삶과 함께 생로병사를 거쳐야 완벽한 것이라 여기는 나를 씁쓸하게 하던 그 노래가 어느 순간 엉뚱한 생각에 빠지게 했다. 사람도 맘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 그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완벽하지 못한 나도 누군가에게 다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한 오만방자한 발상이었다. 한동안 잊혔던 그 가사가 요즘 머릿속에서 맴을 돈다.

허물없는 사람을 만나면 할 말이 많다. 가정사를 알고 속내를 알기에 체면 차릴 일이 없으니 감출 일도 없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고 점심을 하면서 시작된 얘기는 끝이 없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주제는 자연스레 자식으로 넘어간다. 하나 둘 생기는 병이 늘어 갈수록 자식 낳고 제 살림을 사는 자식들의 변하는 마음이 신경 쓰인다. 에둘러 섭섭함을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지인을 보자 내 자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꺼내 놓으며 추임새를 넣는다.

어느 집이건 자식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시기는 비슷하다. 가정경제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이 병고를 겪으면서다. 측은지심으로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재산상속문제로 서로 껄끄럽고 서먹해지는 계기도 그즈음 이고 당당하게 내 몫을 챙겨달라고 요구하는 딸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독립해 살면서도 부모에게 기대려는 심리는 내가 고생하고 자랐다고 허리띠 졸라매며 풍족하게 키워준 보답일까. 죽음 앞에서 서성이는 부모의 생사보다는 잿밥에만 관심을 두는 자식의 배반에 헛헛해진 마음은 건강이 회복되어도 쉽사리 가시지 않을 터다.

칠 년 전이다.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보름 전쯤, 아버지가 주는 마지막 용돈이라며 오십 만원을 흰 봉투에 넣어 주셨다. 두 딸과 세 명의 며느리에게 똑같이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당시 말기암으로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짐을 느끼시고 주변을 정리 중이었다. 많지 않은 현금은 한데 모아 엄마 몫으로 남기고 당신께서 마련해 놓은 산은 세 아들의 아들인 세 명의 손자에게 공평하게 등기를 해 주셨다. 아버지에게 별다른 재산이 없으니 다툼의 여지도 생기지 않았다. 누구도 불평불만 없이 오로지 병간호에만 최선을 다했다. 의식이 육체를 떠나기 전, 자식들에게 고맙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오십 만원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자식을 연필로 그렸을 것이다. 눈에 차지 않는다고 흔적 없이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마음결이 잘못 일렁이면 끊임없이 다독이고 고요해지면 고치고 더 진한 색을 입혀 제대로 사람을 만들려 살이 내리고 뼈가 녹았을 것이다.

요즘, 내 아이들을 눈여겨본다. `이만하면 됐다.'할 수 있게 제대로 그렸을까. 마지막까지 서로 존중하고 고마운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 새해를 맞으며 자식과의 관계를 화두話頭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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