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단상 2
겨울단상 2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1.0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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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 책임지는 일

친정 동네에 내가 4학년까지 다녔던 작은 분교가 있다. 오래전 폐교되어 지금은 이승복 어린이와 유관순 누나만이 교정을 지키고 있지만, 옛날에는 아이들로 운동장이 복작복작했었다. 학교 앞으로 흐르는 개울은 여름이면 헤엄치고 겨울이면 썰매 타며 노는 제2의 운동장이었다.

중학교 때였다. 날씨가 풀리며 가장자리 얼음이 얇아져 아직 두꺼운 가운데 쪽에서 양발 사이에 사촌 동생 영미를 앉히고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민종이가 다가와 장난치며 가장자리로 미는 것이었다. 민종이는 사택에 사는 선생님의 일곱 살 아들로 영미 친구였다. 말릴 새도 없이 우지직 얼음이 깨지며 순식간에 우리 셋은 한 구덩이에 빠졌다. 빨래를 빨던 사모님이 보고 허겁지겁 달려와 민종이를 꺼내 들춰 안고 사택으로 들어갔다.

자기 아들만 구하다니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옆을 보니 영미는 허우적거리며 연신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혼자 어떻게든 살아남아 영미도 구해야 했다. 여름을 떠올리며 집중해서 더듬거리다 보니 다행히 발이 바닥에 닿았다. 서보니 물은 목에서 가슴께에 차는 것 같았다. 그 후 어떻게 영미를 데리고 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해 겨울, 처음으로 오직 나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일의 중압감을 경험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작은 집까지 영미를 데려다 주고 도망치듯 나오는데 작은 엄마의 성난 목소리가 뒷덜미에 꽂혔다.

“옷을 입고 있으면서 무슨 옷을 또 달라는 거야!”

영미를 끝까지 지켜주기에는 그땐 나도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다.



# 인간 상고대

겨울 산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해도 상고대를 만나는 일일 것이다. 하얗게 핀 상고대 그늘에 서면 마음이 온통 환하고 푸근해진다. 수능을 끝내고 맞이하는 새해 첫날에 친구와 함께 산악회를 따라 지리산에 갔었다. 처음 계획은 이른 새벽에 출발해 정상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볼 생각이었지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날씨는 추웠고 바람도 몹시 매서웠다. 더군다나 그때 우린 이런 산행이 처음이었다.

곧 무리에서 뒤처졌고, 인솔자 한 분이 남아 우리를 독려하며 천천히 올라가고 있을 때 한차례 돌풍이 몰아치고 갔다. 일행의 발자국을 비롯해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인솔자조차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허벌판 눈 덮인 산중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혹시 이렇게 헤매다 영영 눈 속에 파묻혀 죽는 건 아닐까 너무 두렵고 막막했다. 일출은 진즉에 포기했지만 돌아갈 수도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길을 찾고 있는 인솔자를 놓치지 않고 바짝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천 년 같았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뭇가지에 묶인 길 표식을 찾았다. 다시 등반을 시작하면서 눈이 그쳤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그제야 상고대가 눈에 들어왔다. 신세계였다. 무서웠던 순간도 잊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겨울 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봄꽃이 아무리 화려하고 예쁘다 한들 극도의 추위를 딛고 피어난 이 신비한 서리꽃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성싶었다. 우리는 결국 정상에 섰고 증거를 남겼다. 눈썹이며 머리카락에 서리꽃이 하얗게 핀 두 소녀가 노고단 표지석 앞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다. 살면서 막막한 순간이면 나는 가끔 그날의 인간 상고대를 꺼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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