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 정신을
새해엔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 정신을
  •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 승인 2022.01.03 1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김명철 청주 금천고 교장

 

대한민국 국민으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가장 큰 시련을 당했을 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졌던 인물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안 의사의 유해가 아직도 다른 나라 땅에 쓸쓸하게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가슴이 아프다. 하루속히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고 와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었다. 이것은 아이에게 북두칠성의 기운 있는 것으로 해석해서 어린 시절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진해 현감을 지냈던 분이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더 열중했다. 특히 말 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함께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도 했고, 천주교에 입교해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신식 학문을 공부하면서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평양에서 석탄상점을 운영하던 중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상점을 팔아 `삼흥학교(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남포에 `돈의 학교'를 인수해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알게 된 안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에는 11명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이것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며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다짐하는 결사조직이었다.

10월 마침내 구국의 결단을 내릴 시기가 찾아왔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안 의사는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한 안 의사는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사열식을 받는 의식 행사 도중에 민족의 원수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3발의 총성이 울리고 `코레아우레'가 천둥처럼 퍼졌다. 안 의사는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고 감옥 근처에 매장을 했다고 알려졌다.

지난 2010년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의사 유해발굴추진단'을 구성하고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지 관련 자료 조사 및 매장 추정지역 현지조사 등을 하면서 중국 당국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직도 안 의사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도 쉬지 않고 독서하고 공부하였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쓰신 많은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금천고등학교 곳곳에는 안중근의사의 유묵이 서각되어 안중근 의사의 뜻과 나라 사랑의 기상을 기리고 있다.

최근 안중근 의사의 후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외손녀 황은주씨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했다. 황 여사는 자녀와 함께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2015년 국내로 돌아와 안중근의사숭모회 도움으로 경기 수원 국립보훈원에 거주해 왔다. 황 여사는 어린 시절 부모가 안 의사의 딸과 사위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자 부모와 생이별하고 상하이에서 외할머니(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씨)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단재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새해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