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단상1, 첫 발자국
겨울단상1, 첫 발자국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2.01.03 1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 첫 발자국

서울 사는 큰딸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 왔다. 한산해진 도로 위로 큼지막한 눈송이가 쏟아지듯 내리는 영상이었다. 하도 푸지게 눈이 내려서 제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를 찍었던 모양이다. 바로 전화를 걸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어릴적 할머니댁에서 비료 포대에 짚을 잔뜩 넣어 눈썰매 타던 일이며, 석정이에게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남기게 해주던 추억도 소환했다.

외딴 주택의 2층을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었다. 밤새 눈 내린 아침 복숭아밭도 논도 구분 없이 창밖이 온통 하얀 눈 세상이던 아담한 집이었다.

눈이 오면 나는 두 딸을 털모자에 털장갑, 털목도리로 완전무장 시켜서 데리고 나갔다. 아무 흔적 없는 새하얀 눈밭에 한 명씩 들어서 발자국을 찍게 했다. 그런 다음 발자국으로 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며 놀았다.

몇 년 뒤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막내 석정이가 태어나자 두 딸은 나이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석정이를 무척 예뻐했었다. 조금 커서는 자기들이 엄마인 양 동생을 돌보곤 했다.

눈이 오면 데리고 나가 발자국을 찍게 하고, 꽃을 만들어 주고, 강아지처럼 눈밭을 뒹굴다 왔다. 빨래야 나중 일이고 그땐 삼 남매의 빨개진 볼을 보며 그저 흐뭇했었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부모는 늙은 거라는데, 큰딸이 작년에 결혼했고 작은딸도 내년에 날을 잡았다.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늘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딸들에게 해준 게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각자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텐데 춥고 고된 시간을 견뎌야 할 때가 왜 없으랴. 바라 건데 그때 깨끗한 눈밭 위에 첫 발자국 찍던 기억을 떠올려 주길, 그래서 용기 내어 다음 발자국, 그다음 발자국을 걸어가 주길 빌어 본다. 그러면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항상 응원하며 지켜봐 줄 것이다.



# 행복한 고구마

내가 좋아하는 수필 중 목성균 수필가의 `행복한 고구마'가 있다.

말단 공무원으로 신접살림했던 시절의 얘기다. 겨울이면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었는데 야근과 상사의 화투판에 잡혀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그때 늦은 밤 버스 정거장 모퉁이에서 군고구마 한 봉지를 사 품에 넣고 가서 졸며 기다리던 색시에게 안겨 주는 재미가 있었다. 좋아하는 아내도 아내지만, 추운 날 지나는 사람도 없는 늦은 시간까지 군고구마를 팔고 있는 다리가 불편한 아주머니를 돕는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날 아주머니 대신 아들인 듯한 소년이 일찍 좀 다니시라 하며 퉁명스럽게 군고구마를 건네주었다. 일찍 다니든 늦게 다니든 네가 무슨 참견이냐고 하자 소년이 “아저씨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감기 걸렸으니까 그렇죠.” 하며 어머니가 늘 영림서 아저씨 퇴근이 늦어서 늦었다 하셨단다.

새색시를 생각하는 새신랑의 작은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아주머니는 그 늦은 시간까지 추위에 떨며 기다려 준 것이었다. 세상에는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 종종 붕어빵을 사 오는데 겨울이면 중학교 근처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함께 구워 파는 `황금 잉어빵'이다. 공교롭게도 그 집 아저씨도 다리가 살짝 불편하시다.

나는 붕어빵을 받아들 때면 가끔 강원도 산골의 어느 겨울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 아주머니의 고구마가 생각난다. 그리고 가끔은 붕어빵에서 군고구마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