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뜨기와 외할머니
실뜨기와 외할머니
  • 박영자 수필가
  • 승인 2021.12.2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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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영자 수필가
박영자 수필가

 

창밖에 눈이 날린다.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눈이 벚꽃 잎 날리듯 희끗희끗 날린다. 우선은 반가움이다. 뒷생각 할 것 없이 눈은 반갑다. 어느 먼 곳에서 오는 그리운 소식처럼. “와! 눈이 오네.” 들을 사람도 없는 혼잣말을 해 놓고 멋쩍어서 웃는다.

회색빛으로 한껏 내려앉은 하늘이며 무채색의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겨울 풍경을 모자이크 하듯 하얗게 채워가고 있다. 집 앞 공원의 나무들도 오랜만에 오는 눈을 머리로 맞고 두 팔을 한껏 벌려 환호하며 만세를 부른다. 소나무는 하얀 눈을 베일처럼 쓰고 더욱 푸르다. 공원 너머 큰길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자동차의 행렬이 눈이 올 새 없이 까맣게 지워버린다. 하얀 눈길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

고층 건물의 옥상에는 하얀 도화지를 펴 놓은 듯 하얗게 눈이 쌓여간다. 네모, 긴네모, 사다리꼴 같은 자를 대고 그은 듯한 직선의 도형들만 펼쳐져 있다. 좁은 골목길에 세워둔 딱정벌레 같은 자동차 지붕 위에서나 소복이 쌓여가는 곡선을 만날 수 있다.

언 듯 스치는 장면, 장독대에 소복소복 쌓였던 어릴 적 본 눈 풍경이 그립다. 도시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어느 산사(山寺)의 기왓골에 하얗게 쌓여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내던 그림과, 처마 끝에서 바람이 스칠 때마다 들릴 듯 말 듯 울리던 풍경소리의 고즈넉함이 그립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며 걷다가 뒤돌아보면 나를 따라오던 앙증맞은 고무신자국도 신기했었지.

눈이 펑펑 내리는 그런 날이면 나와 외할머니는 따끈한 아랫목에 마주 앉아 실뜨기했었지. 눈처럼 하얀 털실을 묶어 둥글게 이어서 양손에 걸고 가운뎃손가락으로 걸어 올리면 가위표 밑에 한 줄이 간 신기한 다리모양이 된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가위표를 잡아 밑으로 들었다 올리면 마름모가 가운데든 방석이 된다. 할머니는 “옳지” 하며 추임새를 넣고, 내가 걸고 있는 방석모양에 두 손가락을 넣어 넉 줄이 늘어선 젓가락 모양을 만드신 할머니께 나도 따라서 추임새를 넣으며 둘이 번갈아 실뜨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리가 방석이 되고, 젓가락이 되고, 뚜껑이 되고, 신기한 모양이 될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싫증이 날 때쯤이면 한쪽 실을 입에 물고 양쪽 가운뎃손가락의 실을 뒤집어 네 갈래의 톱을 만들어 두 갈래씩 잡고 서로 잡아당기면 톱질 뜨기가 된다. “톱질하세. 톱질하세. 슬근슬근 톱질하세.” 실뜨기 놀이는 언제나 톱질 뜨기로 끝이 났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배운 실뜨기는 할머니와 나의 유일한 사랑놀음이었다. 실이라는 끈을 통하여 대화를 나누고 정(情)을 쌓아가는 따끈따끈하고 실팍한 사랑의 통로였다. 무명 앞치마를 치신 쪽진 할머니의 흐뭇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실뜨기는 할머니에서 차츰 친구들로 대상을 넓혀 갔고 어릴 적 놀이가 나를 키웠으며 내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손녀들에게 실뜨기를 가르쳐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까?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 나름의 재미를 찾고 있겠지만, 날씨는 춥고 놀이터에도 나오기 조심스러우니 집안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쓰럽고 안타깝다.

코로나, 팬데믹, 언텍트, 거리두기, 확진자, 자가 격리, 위증증환자, 집콕, 재택근무, 홈트... 생소하여 낯설기만 하던 용어들이 차츰 익숙해져 가고 있는 난감한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 웃을 일은 찾아보기 힘들고 슬픔은 깊어지며, 고립된 생활로 서로 어울려 살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만 가득하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때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 세상, 하루를 보내기가 너무 지루하다. 무엇인가 위로가 필요한 우리들이다. 삶은 흔들리며 가는 길, 걸어갈 때도, 뛰어갈 때도, 멈추어 설 때도 있는 법, 서로를 위무하며 하루에 한 발짝씩이라도 뚜벅뚜벅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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